그가 있어 진경산수가 완성됐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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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대전> 통해 본 김홍도 예술의 진면모/문인화·인물화 등에도 두루 능해

 
지난 5월10일 낮,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원들의 손에는 펜 대신 걸레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1년에 딱 두 차례, 봄·가을 보름씩만 문을 여는 간송미술관이 봄 전시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5월15~29일 열리는 전시회는 <단원대전(檀園大展)>. 단원 김홍도(1745~?)의 그림 1백20여 점이 일반에 공개된다(관람료 없음, 02-762-0442). 간송미술관은 1973년 처음 단원전을 연 이래 단독으로, 또는 호암미술관이나 국립박물관과 함께 여러 차례 단원 그림을 소개했지만, 이번처럼 대규모 전시는 처음이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연구실장에게 단원 그림 감상법을 들었다.

단원 김홍도는 풍속화가다? 단원이라고 하면 서당이나 주막 풍경 등을 해학적으로 그린 풍속화가 우선 떠오르는 이들에게 이번 전시는 새로운 충격을 줄 듯하다. 1백20점의 그림 어디에서도 풍속화 흔적은 없다. 전혀 새로운 단원의 그림 세계가 펼쳐진다. 어, 단원이 이런 화가였던가?

우선 ‘문끼(文氣)’가 철철 넘치는 그림 한 점을 보자. <소림야수(疏林野水)>. 대학 노트 크기의 종이 위에 그린 이 담채화는 이번에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이다. 쓸쓸한 들녘에 엉성한 고목 두서너 그루, 그 밑에 외로운 정자 한 채. 그림에서 원말 남종문인화의 중흥조였던 운림 예찬의 화풍이 엿보인다. 예운림이 추구했던 깔깔하고 고졸한 미학은 현재 심사정 이래 수많은 조선 사대부 화가들에게 본이 되었다. 단원 또한 내심 문사임을 자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고졸한 흉내를 내고 있을 뿐 단원의 기량이 워낙 뛰어나 문인들에게서 보이는 어설픈 맛이 전혀 없다. 먹의 농담으로 광활한 들녘에 전개된 모든 정경을 빠짐없이 묘사해 놓았다. 단원은 이밖에도 눈 덮인 정자나 대나무·매화 등 문인화의 소재를 즐겨 그렸다. 하지만 화원 특유의 세기를 숨길 수 없어서, 가령 그의 매화 그림은 매기(梅妓)를 보는 듯 요염하다.

그림 여기저기에 어지간한 사대부는 눈에도 차지 않았을 오만이 묻어나지만, 알고 보면 단원은 사대부가 아닌 중인 출신 화원이었다. 전시된 그림들은 단원이 신분에 걸맞지 않게 자신만만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으로 관람객들을 인도한다.

중국풍 ‘도석화’ 완벽하게 조선화해

단원은 스물아홉 살 때 어진 화가가 되면서 정조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정조의 나이 스물둘. 청년 정조는 일곱 살 연상 젊은 화원의 솜씨에 매료되었다. 정조는 어진뿐 아니라 궁중에서 벌어진 일이나 궐 밖의 산수까지 다양한 그림을 단원에게 주문했다. 단원은 마음대로 여행할 수 없었던 왕을 위해 전국 곳곳을 누볐다. <구룡연> <명경대> <마하연> 등 금강산의 절경이나 단양 팔경을 그린 산수화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김홍도는 화가가 그릴 수 있는 모든 그림에 다 능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인물화에 탁월했다. 전시장에는 단원의 인물 묘사력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도석화(道釋畵)가 여러 점 걸려 있다.

단원의 초기 인물화 속 모델은 주로 도가 인물들이다. 40대 중반 중병을 앓고 난 뒤부터는 주로 스님을 모델로 한 인물화를 그렸다. 그런데 도석화 모두 인물화 속 주인공의 인상이 낯익다. <낭원투도( 苑偸桃)>는 삼천갑자 동방삭이 낭원에서 선도 복숭아를 훔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중국 설화에서 얻은 소재지만, 동방삭의 얼굴은 이마가 불룩 솟은 중국풍 신선이 아니라 조선의 평범한 사내와 닮았다.

<절로도해(折蘆渡海)> 속 달마 대사는 우리가 흔히 보는 눈이 부리부리한 달마 대사가 아니다. 나한의 얼굴은 평범한 조선 승려의 것이고, 관세음보살 또한 이웃집 어머니의 표정이다. 최완수 실장의 표현에 따르면, 단원은 중국풍 도석화를 완벽하게 조선화한 화가였다.

단원은 표암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웠다. 하지만 단원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겸재 정선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단원의 특기인 풍속화도, 진경산수도 모두 겸재에 뿌리를 둔 것이다. 겸재와 단원의 산수화를 함께 보면 단원이 겸재에게서 받은 영향과 차이를 확연하게 볼 수 있다.

 
단원의 <구룡연>과 겸재의 <박연폭포>는 여러 모로 닮은 그림이다. 물줄기가 까마득한 수직 절벽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를 묘사하기 위해 단원은 겸재처럼 먹으로 쓱쓱 쓸어내리는 필법을 구사한다. 하지만 눈앞 풍경을 과감하게 가감해 그리는 겸재와 달리 단원의 묘사는 그림 하단의 낮은 봉우리를 오르는 선비 두 사람을 그려 넣을 정도로 섬세하다. 세기로만 보자면 겸재는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단원의 묘사력을 따라 가지 못한다. 하지만 호방한 겸재와 비교했을 때 단원의 그림은 심약하기 짝이 없다.

두 사람의 화풍 차이를 최완수 실장은 둘의 출신 내력에서 찾는다. 최실장은 “겸재는 진경산수 화풍을 창안한 사대부였고 단원은 조선의 진경산수를 마무리한 ‘기술자’(화원)였다. 조선 시대에는 문인들이 창안한 화풍이 화원들에 의해 집대성되곤 했다”라고 말했다.

겸재로부터 시작된 진경산수는 관아재 조영석으로 계승되고, 현재 심사정이 중국 남종문인화를 받아들여 일전시킨 뒤 단원과 혜원(신윤복)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겸재·관아재·현재가 모두 사대부였던 반면 단원이나 혜원은 화원이었다. 이들 이후 추사 김정희가 청조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문인화의 세계를 열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단원은 정조와 떼놓고 설명할 수 없는 화가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48세 때 충청도 연풍현감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관리로서의 자질은 별로였던 듯하다. ‘풍류객’에 더 가까웠던 그는 3년 뒤 비리 혐의를 받고 포박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뒤 파직되었다.

정조는 그를 다시 불러 곁에 두었다. 56세 때, 정조가 승하하자 그의 시대도 끝났다. 그는 가산을 탕진하고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그에 대한 기록은 5년 뒤인 1805년 8월 이후 사라졌다. 그해 가을, 늦어도 이듬해쯤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간송미술관이 이번 전시를 역대 최대 규모로 준비한 까닭도 올해가 단원 서거 200주기에 가장 유력한 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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