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가운데 웅크려 마음의 뒤란 응시하다
  • 이경호 (문학 평론가·서울여대 겸임교수) ()
  • 승인 2004.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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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맨발> 문태준/창비
문태준의 두 번째 시집인 <맨발>은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에서 현실의 ‘뒤란’에 쏠렸던 시인의 시선을 마음의 ‘뒤란’과 연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삶의 현실과 마음이 연계되는 ‘뒤란’은 일상의 ‘저녁’ 시간대, 사물의 모습이 ‘어두워지는 순간’을 시적 상상력의 무대 배경으로 삼고 있다.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자연의 풍경과 사람이 생활하는 모습이 하나로 버무려지고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느낌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과거의 추억이 되살아나 현재의 빛 바랜 생활과 겹쳐지는 마음의 느낌을 시인은 ‘황홀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한 마음의 ‘황홀’은 삶의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세상의 싸움과 욕망과 피로와 슬픔을 견디는 내성(耐性)이다.

‘뒤란’의 내성은 세상에서 물러난 자의 마음이 아니라 세상에 오래 웅크려본 자의 마음으로 다져진 것이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을 보여주는 그 내성은 많은 것을 품고 다독거릴 수 있는 ‘마음의 곳집’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 내성은 세상의 헐벗고 험한 관계를 버무려 품으려 하기 전에 마치 ‘못을 벗어나 못을 되돌아보는 이름 모를 새의 가는 목처럼’ 세상의 헐벗고 험한 관계를 참으로 세세히 응시하는 시선을 부려놓는다.

이번 시집의 가장 뚜렷한 성취는 그렇게 세세하게 응시하는 시선의 자취이기도 하다. 논두렁에 정지된 동작으로 서 있는 황새의 자태에서 ‘무논에 써레가 지나간 다음 흙물이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그는 한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을 본다/한 획 필체로 우레와 침묵 사이에 그는 있다’는 시행을 포착해내는 시선은 참으로 공교로운 것이다. 그러한 시선의 결실은 아마도 ‘빛보다 그림자로 더 오래 살아온 것들이 내 눈 속에 붐’비는 체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삶의 ‘뒤란’에는 앞마당과는 달리 ‘빛보다 그림자’가 드리우는 시간이 오래기 때문이리라.

그러한 ‘그림자’의 체험이 그의 시에 고요함으로 깊어지는 삶의 자세를 마련해주고 있다는 점도 지적할 만한 사실이다. ‘어두워지는 순간’에 모든 자연의 풍경과 인간의 생활이, 그리고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하나로 버무려질 수 있는 원동력도 어두움이 마련해놓는 고요함의 분위기 속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요함 속에서 삶에 대한 시선은 세심해지고 깊어진다. 그 시선은 대체로 현재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선일 때가 많다. 그러나 어두움의 고요함 속에는 또한 가라앉은 슬픔과 상실감의 자취도 남아있다. 그 시선은 과거의 체험을 돌아보는 시선일 때가 많다. 그의 삶과 마음을 잇는 ‘뒤란’은 그렇게 고요함으로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세계를 아로새겨 놓고 있다.

추천인:박수연(문학 평론가) 이경호(문학 평론가·서울여대 겸임교수) 이광호(문학 평론가·서울예대 교수) 정끝별(시인·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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