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前 대주교 “잠자는 토끼 깨우지 않은 거북이도 불공정”
  • 인천 강화=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2.18 13:15
  • 호수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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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주년 특별기획] ‘헌신·나눔의 삶’ 김성수 前 대한성공회 대주교 “예수도 하느님을 ‘내 아버지’ 아닌 ‘우리 아버지’라 했다”

혼돈의 시대다. 변화의 시대다. 시사저널은 창간 3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길을 묻다’ 특별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을 만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헤쳐 갈 지혜를 구하는 기획이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 시점에 따라 정해졌다. ⓛ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 김성수 前 대한성공회 대주교

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는 한국 종교계를 대표하는 원로 가운데 한 분이다.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이념적 좌우 진영을 막론한다. 그가 대주교로 활동한 대한성공회는 국내 신도 수가 10만 명이 채 되지 않지만, 민주화의 산실 같은 역할을 했다. 성공회는 개신교의 한 교파다. 

청렴·헌신·소통은 김 전 대주교가 평생을 지켜온 삶의 기준이자 철학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이사장, 반부패국민연대 회장, 푸르메재단 이사장 등을 맡으면서 그는 현장에서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성공회대 총장 시절 학교로부터 한 푼의 판공비도 받지 않고 각종 비용을 자신의 월급으로 충당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김 전 대주교는 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왔다. 그가 은퇴 후 고향인 인천 강화로 내려와 발달장애인 재활시설 ‘우리마을’을 건립, 운영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장애와 비장애의 장벽이 사라진 곳이다. 1월30일 강화도 우리마을에서 만난 김 전 대주교는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 시사저널 임준선
ⓒ 시사저널 임준선

교회의 대형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영국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에선 우리보다 한참 전에 큰 교회가 등장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도서관이 됐죠. 우리도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서양 것 중 좋은 것만 받아들여야지, 잘 안된 것을 받아들이고 흉내 내선 안 돼요. 그러니 예수가 교회를 짓지 않은 거 아닌가요.”

대주교님 또는 주교님이라고도 부르는데, 정식 호칭은 뭔가요.

“우리 성공회엔 ‘관구’라는 조직이 있어요. 관구장이 되면 ‘대주교’라고 부르죠. 그런데 대주교라고 하면 무겁지 않습니까. 그래서 평상시엔 ‘주교’라고 부르고, 법에만 ‘대주교’라는 자리를 만들자고 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캔터베리 대주교(성공회 최고 성직)’ 벤슨이 영국 해군 군종신부였던 고(高)요한(Corfe)을 초대 주교로 1889년 9월29일 한국에 파송한 것이 대한성공회의 시작이다. 1992년엔 서울·대전·부산 등 3개 교구를 합쳐 독립관구로 승격하고 김성수 주교를 초대 관구장에 선임했다.)   


“가장 듣고 싶은 호칭은 우리마을 촌장”

주일날(일요일)은 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는지요.

“여기서 우리 친구들하고 보내요. 이곳 ‘우리마을’엔 서울교구 교구장이 신부님을 원장으로 파송해요. 난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땅 좀 내놓고, 이거 만들 때 수고했다고 해서 여기 조그만 공간을 사무실로 쓰라고 해서 고맙게 쓰는 것뿐이지.”

개인적으로 주교님, 대주교님, 촌장님 중 어느 호칭이 가장 좋으신가요.

“여기서 발달장애인들하고 같이 먹고 자고 하니까 촌장(村長)이라고 불러주는 게 가장 좋아요.” 

건강은 어떠신가요.

“외모로는 괜찮은데, 속으로는 종합병원이에요.”

얼굴은 좋아 보이십니다.

“요새 좀 좋아졌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서울에서 이곳 강화로 이사 온 지 10년이 됐어요. 처음 이사 올 때는, 사람들이 ‘아이고, 저 양반 오래 못 살 것 같다’고 했는데 여기 와서 천진난만한 아이들하고 지내고, 공기 좋고 물 좋고 사람 좋은 곳에서 사니까 건강이 좀 회복됐어요. 그래도 60대 같지는 않지만요.”(김 전 대주교는 올해 90세다.) 

인터뷰하던 중 점심시간이 되자 우리마을에서 일하는 발달장애인들이 구내식당으로 모였다. 김 전 대주교가 식당에 들어서자, 부모를 만난 듯 하나같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외지인의 시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점심 먹었어? 인마!”(김 전 대주교)

“네. 먹으려고요. 신부님, 우리 기도해요.”(우리마을 A원생)

“그래. 기도하자. 다들 손 모으고…. 하느님~”(김 전 대주교)

“감사합니다.”(원생 일동)

“우리는~”(김 전 대주교)

“최고다.”(원생 일동)

식사기도는 늘 이렇듯 약식으로 끝난다. 이유를 묻자 “이들에게 기도란 길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곳 우리마을은 2000년 김 전 대주교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3000평)을 기부해 만든 장애인시설이다. 우리마을에서 지내는 발달장애인들은 유기농콩나물과 전자부품을 조립해 팔아 번 돈으로 생활한다. 김 전 대주교 집안은 예로부터 이곳 강화에서 선박업을 했다. 폐병으로 10여 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뒤늦게 성직자의 길로 들어선 그가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뒤인 1973년 처음 목회활동을 시작한 곳도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지적장애인시설 ‘성베드로학교’다. 이곳에서 그는 10년간 교장으로 활동했다.  

이름을 우리마을이라고 지은 이유가 있나요.

“이름을 지을 적에 뭐라고 지을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사실 ‘너’ ‘나’를 떠나면 다 ‘우리’예요. 또 ‘우리’가 돼야 발달장애인하고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지요. 우리 발달장애인들이 참 착하고 욕심이 없어요. 그런 사람들하고 사는데 특정한 이름보다는 보편적이면서 부르기도 쉬어야 했지요. 그래서 몇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누가 우리마을이 어떠냐 해서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판매품목으로 콩나물을 생각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초창기만 해도 발달장애인들이 얼굴을 들고 살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요즘은 나아졌지만…. 제가 1970년대 ‘(성)베드로학교’라고 최초의 발달장애인학교를 만들었어요. 거기 졸업한 사람들의 부모들이 ‘신부님, 우리 아이들이 갈 데가 없어요’라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성인이 되니 그랬겠죠. 이들이 졸업하고 와서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자고 해 이렇게 만든 거예요. 처음에는 고추·버섯을 길렀어요. 상추도 기르고…. 그때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그런지 물건을 만들면 뭐 해요, 사줄 사람이 없는데…. 그리고 아무래도 발달장애인들이 만드니 아주 고급 상품은 아니었거든요. 그러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콩나물을 하자고 했던 겁니다. 콩나물을 기르긴 했는데 문제는 팔려야죠. 우리 직원들이 음식점을 돌아다니면서 팔고, 장날에도 갖고 나갔어요. 그렇게 열심히 하던 중 5~6년 전 풀무원과 협약을 체결했어요. 그 전에는 아이쿱생협에서 콩나물을 사갔고요. 그렇게들 사가면서 오늘날 우리마을이 콩나물로 유명해진 겁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4월17일 청와대에서 대한성공회의 독립관구 승격을 위해 내한한 조지 커리 캔터베리 대주교(가운데)를 접견하고 초대 관구장에 취임한 김성수 주교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4월17일 청와대에서 대한성공회의 독립관구 승격을 위해 내한한 조지 커리 캔터베리 대주교(가운데)를 접견하고 초대 관구장에 취임한 김성수 주교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장애인이 행복해야 나라가 행복해진다”

처음부터 왜 발달장애인들에게 헌신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우리 성공회 신부들은 주교님의 명령에 순종한다고 서약합니다. 영국에 있을 때 이철환 주교라는 분이 제게 ‘성공회가 경기도 수원에서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다. 돌아오면 장애인을 위해서 일하는 게 어떠냐’고 해서 ‘명령하시면 해야죠’라고 했지요. 귀국하면서 영국·미국·캐나다·일본의 시설을 둘러보고 왔어요. 그게 계기가 돼 오늘까지 발달장애인하고 살고 있는 겁니다. 난 내가 뭘 하고 싶어서 된 게 없어요. 다 ‘~하면 좋겠다’ ‘해라’라고 해서 된 거지. 난 결코 잘난 사람이 못 됩니다.”

장애인들 할 일이 점점 줄고 있지 않습니까. 

“기계도 자동, 수동이 있어요. 우리 친구들이 콩나물을 봉투에 집어넣는데 기계처럼 정확합니다. 차별할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들에게 일을 찾아줘야죠. 이들이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고, 그래야 나라가 행복한 법이니까요. 이들과 함께 살아야 좋은 사회고 복지사회예요. 우리끼리만 잘살면 뭐 하나요. 장애인은 장애인대로 이 세상에서 쓸모가 있어요. 장애인에게도 일을 줘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은 어떻게 보세요.

“우리마을 콩나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4분의 1은 한 달에 100만원 정도 받아요. 그런데 전자부품을 조립하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해 봐야 3000원밖에 못 받아요. 한 달 일해도 월급이 몇만원밖에 안 되죠. 그래서 콩나물 공장에서 번 돈을 전자부품 조립하는 친구들에게 나눠줘요. 최저임금 인상도 할 적에 뜻은 좋았을 겁니다. 그런데 너무 성급했어요. ‘앞으로 몇 년 후 이렇게 하겠습니다. 일단 여기, 이 업종부터 해 보겠습니다’라고 했어야 말썽이 안 나지. (정부가) 좀 여유를 갖고 일했으면 좋겠어요.”

선친께 물려받은 땅을 내놓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아버지도 할아버지께 물려받으신 거예요. 그리고 내가 이걸 갖고 있으면 뭐 해요. 앞에 있는 운동장 부지도 강화군에 다 줬어요. 양로원(나린하우스)이 들어설 자리도 그렇고….”  

자식분들이 서운해하지 않던가요.

“조금 있겠죠. 하지만 이왕 기부한 거 어떻게 하겠어.” 

대주교님은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어떤 점이 가장 안타깝나요.

“너무 많아서 한마디로 뭐라 말하긴 힘들어요. 다만, 게으른 이들에겐 ‘열심히 살라’고 말하고 싶어요. 요즘은 핑계만 대는 놈들이 많아요. 나는 5개밖에 없다며, 남이 가진 10개를 보며 좌절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죠. 노력하면 되는 건데, 왜 손가락질만 하고 삽니까.” 

하지만 우리 사회가 점점 공정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미국에 가서 주일학교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죠. 그 자리에서 내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끝까지 노력하면 반드시 1등을 한다고 말이죠. 그랬더니 주일학교 학생들이 그건 공평치 않다는 거예요. 토끼가 잠을 자고 있으면 거북이가 깨워서 같이 가야 한다고. 그게 공평한 게임이라고. 거기서 내가 쇼크를 받았어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일본 놈들에게 얼마나 모질게 당했으면 끈기 있게 살라고 가르쳤을까’하고 말이죠. 우리가 ‘토끼를 깨우는 거북이’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요즘 세태는 자기 PR(자랑)을 강조하는데.

“이제 세상이 그렇게 됐어요. 지금 아이들에게 ‘이 녀석들아, 어른에게 인사 좀 해’라고 말하면 뭐 하겠어요. 솔직히 우리가 그렇게 만든 건데. 기성세대의 책임이 커요. 우리가 먼저 반성해야 해요. 우리가 제대로만 살아왔다면, 지금 젊은이들이 버르장머리가 왜 없겠어요. 젊은이만 탓할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텐데….”  

요즘 읽으신 성경 말씀 중에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그때그때마다 변해요. 그런데 요즘은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주(主)기도문’이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는 주기도문에서 예수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아요.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 그 짧은 주기도문 속에 ‘우리’라는 말이 6번 나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살아야 해요. 교인이 몇백 명, 몇천 명 모여서 주기도문을 외워 말하면 뭐 합니다. 말만 우리 아버지지. 나가서 ‘우리’답게 행동한 게 뭐 있나요. 세상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찾아보고 돌봐주는 게 그게 ‘우리 아버지’의 뜻이에요.”  

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가 기도할 때 사용하는 묵주 ⓒ 시사저널 임준선
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가 기도할 때 사용하는 묵주 ⓒ 시사저널 임준선

“교회의 세습화·대형화 걱정된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이유도 이것과 관련 있어 보입니다.

“그렇죠. 아버지가 하던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는 게 ‘우리정신’인가요. 그냥 ‘아들’이지.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교회에서 처리해야지, 왜 재판소로 가나요. 목사가 교회에서 안수 받은 일을 판검사에게 물어보면 알겠어요? 우리끼리 해결하려고 노력해야지.” 

한국 교회의 성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왜일까요. 

“너무 교회를 크게 지어서 그래요. 큰 울타리만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만 우리라고 생각하거든요.”  

경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려운 걸 너무 참지 못하는 세상인 거 같아요. 사실 어렵다고 하는데, 우리끼리 어려운 거잖아요. 남의 나라 밑에서 36년간 지배받아온 거랑 비교하면 지금 이게 어려운 걸까요? 어려움을 슬기롭게 넘기는 방법은 참고, 견디고, 공부하는 것밖에 없어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금을 모으자고 했잖아요. 그런 멋있는 일, 멋있는 말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연세가 90세신데 후대에게 어떤 분으로 기억됐으면 하나요. 

“난 가끔 후배 신부들을 만나면 ‘내 장례식은 여기서 조용히 치러 달라’고 해요. 죽고 난 다음에 책도 만들지 말라며 말이죠. 납골당에도 하지 말고 다 뿌려 달라고 했지요. 아무것도 안 남기고 싶어요. 세상살이가 다 바쁜데 뭘 기억하라고 합니까.”

김 전 대주교는 1987년 서울교구장 시절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 위치한 서울주교좌성당에서 6·10 국민대회의 시발이 된 ‘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해 대한민국 민주화의 서막을 알렸다. 이날 시국미사를 위해 계훈제 선생, 금영균·박형규·오충일 목사, 지선·진관 스님, 김명윤 민추협 부의장, 김병오 민추협 상임위원, 이규택 민추협 대외협력국장, 유시춘 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 홍보위원 등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관계자 12명은 6월8일과 9일 이틀에 걸쳐 대회장인 성당에 들어갔다. 

천주교에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다면, 개신교에는 김 전 대주교가 민주화의 불을 붙였다. 그래서인지 김 전 대주교는 교회 밖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김수환 추기경을 꼽았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늘 ‘나는 바보다’라고 했거든요. 나도 엇비슷하게 그렇게 말했는데, 그 유명한 분이 자신을 가리켜 ‘바보’라고 하니 어쩌겠어요. 그래서 나는 ‘못난이’라고 말해요. 못난이(웃음).”

두 사람은 종파를 초월해 교류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인터뷰에서 김 전 대주교는 “그 양반(김수환 추기경)이 나하고 연령차도 있고…. 워낙 높은 데 계시지만, 어디 모임에 가서도 자기 자랑을 한 적이 없어요. 늘 부족하다고 하시지”라며 김 추기경을 회상했다.

진보, 보수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필요해요. 둘은 있어야지. 지금 야당 생활했던 사람들이 여당이 되고, 여당이 야당이 됐는데요. 이야기를 서로 나눌 수 있는 쌍방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픈 얘기 슬픈 얘기, 좋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세상이 되면 보수, 진보라는 게 그렇게 답답한 것만은 아니죠.”  

정부의 적폐청산은 어떻게 보세요.

“어느 정당이건 정권을 잡으면 다 그렇게 해 왔잖아요. 정치하는 사람들은 막 이야기해 놓고 ‘안 되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예요. 대통령이 후보 시절 청와대를 광화문으로 옮기겠다고 했죠? 아마 막상 대통령이 되고 보니까 옮기면 광화문 일대가 난리 나거든. 지금 못 하겠다고 얘기하는 거 자체가 얼마나 우스워요. 결과가 좋으려면 과정이 좋아야죠. 과정이 다 멸시되고 그러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는 건 애초부터 하지 말았어야 했나요.

“그럼요. 하지 말았어야지. 그건 상식 아닌가? 대통령이 어떻게 정부청사에서 일을 해요. 구라파(유럽)처럼 국회의원이 자전거 타는 세상이면 몰라. 대통령이 지나가면 길 막고 자동차 막고 그러는데. 지난번 선거 때 그런 말이 나오기에 나는 ‘어휴, 저런 얘기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때 그게 뭐 씨나 먹히는 일이었겠어요.”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공약, 애초부터 잘못”

대통령 탄핵이나, 촛불정신에 대해선 어떻게 보셨나요.

“탄핵도 말입니다. 사실 다른 나라에선 이런 일이 거의 없잖습니까. 대통령이 잘못한 것을 감싸준 사람이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나도 가만있었지만…. 사람 생각이 짧고 모자라단 생각이 들어요.”

보수정치가 어떻게 변해야 하나요.

“나는 보수라는 말도 싫어요. 뭐가 보수고, 뭐가 진보야. 다 똑같은데. 이북(북한)을 찬양하면 진보고, 찬양 안 하면 보순가. 그 말부터 고쳤으면 좋겠어요.” 

성공회대가 진보정치의 산실인데, 이분들이 현실정치에 들어가면 세속화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양반들이 5년만 정권을 잡고 그만둘 건지. 좀 느긋하게 5년 동안 할 일을 10년 걸려 하겠다며 천천히 하면 좋으련만. 지금도 우리 청년들 일자리가 없다고 하면 하루 이틀은 난리 피우다 그만 아닌가. 장기계획을 세워 좀 천천히 갔으면 좋겠어요.”

시민단체 출신들이 끼리끼리 모여 일하는 건 어떻게 보시나요.

“그게 문제야. 청와대에 들어가면 왜 자꾸 사람들이 달라졌다고 그럴까.”  

제도적으로 대통령 임기를 늘려야 할까요.

“늘리면 좋은데, 현실적으로 상대방이 ‘너만 정치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지금의 조국 대한민국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경제적으로 너무 좋아졌어요. 그런데 우리 후손을 생각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더 잘살아야지. 아직도 가난한 사람이 많거든요. 좀 덜 잘살되, 구라파 사람들처럼 너무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거 같아요. 내가 장애인하고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함께 잘사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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