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 살찌우는 '무공해 채식'
  • 오윤현 기자 (noma@e-sisa.co.kr)
  • 승인 2001.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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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견과류 섭취하면 '영양' 별 문제 없어…
생명 존중·광우병 걱정 해방 '일거양득'


"채소는 체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어 당뇨나 고혈압·폐암·심장병에 걸릴 확률을 현저히 떨어뜨린다.ⓒ사진:한향란, 포토일러스트레이션:시사저널 양한모

인류사에서 요즘처럼 육식의 효능을 의심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이미 1970년대부터 육류로 인한 폐해가 하나둘 드러났지만, 그동안 인류는 쇠고기나 닭고기가 주는 기름지고 담백한 영양소에 끌려 육류를 어떤 식품보다 즐겼다. 그렇지만 유럽의 광우병과 구제역 파동으로 육류는 이제 '위험 식품' 군으로 떨어졌다. 생선도 예외는 아니다. 식탁에 올라오는 많은 생선이 항생제로 사육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보다 앞서 나온 환경론자들의 '으스스한 주장'도 육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한몫 하고 있다. 환경론자들에 따르면, 고기를 생산하기 위한 가축 대량 사육 방법이 지극히 파괴적이어서, 인류를 위한 식품을 얻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잃는 것이 더 많다. 열대 우림 파괴가 대표적이다. 국제유기농운동연합 지도자 베른바이트 가이어는 "햄버거 하나를 만드는 데 열대 우림 9㎡가 파괴된다"라고 말한다. 가축 대량 사육은 그 외에도 수질 오염, 동식물 경시 풍조, 비만, 기아 등을 불러온다.


한국에도 채식 인구 40여만 명


육류에 대한 태도 변화는 먼저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다. <뉴스위크>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지금 유럽에는 녹색 바람이 거세다. 레스토랑은 메뉴에서 스테이크와 같은 육류 요리를 제외하고, 채소로 만든 요리를 채워 넣고 있다. 식품 산업도 유기농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 영국의 유기농 시장은 1990년 이후 6배나 커졌다. 독일에서는 광우병 보고서가 나온 뒤 채식주의자가 그 이전의 두 배인 6백60만명까지 늘어났다.

미풍(微風)이지만 한국에서도 채식 바람이 불고 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시골생활뷔페 대표 유정숙씨는 "고기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면서 최근 새 손님이 부쩍 늘었다"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채식을 해온 신현정씨(30·증권사 근무)는 "과거에는 동료들과 식사를 하면 따가운 시선 때문에 부담스러웠는데, 요즘은 보는 눈이 훨씬 부드러워졌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에는 채식 인구가 40만 명 가량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아직 사람들에게 채식은 낯설고 부담스럽다. 그들의 의문은 한결같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몸을 채식으로 지탱할 수 있을까, 고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양소를 채식으로도 얻을 수 있을까, 먹는 즐거움이 없지 않을까.

학자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일부 식품영양학자는 '생선·우유·달걀을 먹지 않고 식물성 식품만 섭취하면 필수 아미노산이 결핍되어 영양 불균형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상업 교수(삼육대·식품영양학)를 포함한 몇몇 학자들은 배아가 있는 곡류를 비롯해 콩과 견과류를 충분히 먹으면 영양 문제는 별 걱정이 없다고 말한다.

채식을 오래 해온 사람들은 대부분 이교수와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채식을 해도 영양에는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14년 동안 채식을 해온 이원복씨(34·건강동호회 '채식나라' 대표)는 "식단을 잘 짠 덕분인지 채식으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많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채식을 한 뒤로는 감기 한번 걸린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경험자들 말만 들어보면 채식은 건강에 이로운 행위임에 틀림없다. 서양 과학자들이 증명한 사실을 몇 가지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배추와 무 같은 겨잣과 식물은 대장암에 걸릴 위험성을 현저히 감소시킨다. 바나나는 위궤양에 좋다. 콩을 규칙적으로 먹으면 당뇨병 환자는 인슐린 주사를 일부 줄일 수 있다. 체리는 충치를 예방한다. 생강·마늘·양파는 탁월한 혈액 희석제로서 심근경색을 예방한다. 양파는 강력한 항생제 작용을 하기도 하는데, 5분간 생 양파를 씹으면 구강 안이 무균 상태가 된다(호세 루첸베르거·프란츠 테오 고트발트 지음 <지구적 사고, 생태학적 식생활>).

여러 채소가 체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어 당뇨·고혈압·폐암·심장병·유방암에 걸릴 확률을 현저히 떨어뜨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보건대학 요시푸라 카우무디 박사는 브로콜리와 양배추 그리고 녹색 잎 야채·감귤류, 비타민C가 듬뿍 들어 있는 과일을 많이 섭취한 사람일수록 뇌졸중에 걸릴 확률이 낮다고 밝혔다.

그러나 꼭 건강을 위해서 채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서는 환경이나 동물 보호 차원에서 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서울 녹번동에 사는 고미라씨(35·대학 강사)는 "인간이 동물을 학대하는 현실을 알고 나서 채식을 시작했다"라고 말한다(1998년 한국에서 도살된 소가 85만 마리나 된다). 이원복씨는 한국의 채식주의자를 종교적 이유나 수행을 위해 채식하는 사람 15만명, 건강을 위해 채식하는 사람 15만명, 환경을 위해 채식하는 사람 10만명으로 분류했다.

어떤 이유로 채식을 하든, 싱싱한 녹색 영양소를 마음껏 섭취하려면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육류를 금할 것인지 정한다. 채식을 하는 사람은 통상 다섯 부류로 나뉜다. △ 유제품은 먹되 달걀은 먹지 않는 락토(lacto) 채식주의자. △ 유제품과 달걀을 먹지 않는 락토보(lacto-ovo) 채식주의자. △ 유제품과 달걀은 물론 생선까지 먹는 페스코(pesco) 채식주의자. △ 거기에 닭고기도 먹는 세미(semi) 채식주의자. △ 육류와 유제품은 물론 벌꿀까지 먹지 않는 비건스(vegans) 채식주의자. 어떤 채식주의자가 될 것인가는 자신의 몸 상태와 처지를 생각해 결정한다.

'급수'를 결정했다면 채식 관련 서적이나 인터넷 사이트, 혹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채소를 식탁에 올린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푸른생명한국채식연합 서울 지역 대표 이광조씨(34·대학원생)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채식을 하면, 그만큼 실패하거나 도중 하차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한다. 그는 무엇보다 생명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일이 소중하다고 덧붙인다. 단지 입맛을 위해 소중한 생명을 죽이는 부조리를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족의 동의까지 구했다면 바구니를 들고 시장으로 나가자. 멀리 갈 필요는 없다. 물론 유기농 채소를 섭취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어디 믿고 사기가 쉽던가. 또 가격도 만만치 않다. 동네 슈퍼에서 파는 야채도 알고 보면 괜찮다. 흐르는 물에 씻으면 농약 성분이 대부분 씻겨 나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소금물에 5분 정도 담갔다가 먹으면 안심할 수 있다.


상차림은 잎·줄기·뿌리 채소와 과일 조화시켜야


상차림은 잎·줄기·뿌리 채소와 과일 등을 조화시킨다. 그래야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할 수 있다. 이때 주식으로는 현미밥이나 잡곡밥을 먹는다(현미의 영양가는 백미보다 5배나 높다). 식단을 이렇게 짤 수도 있다. 월요일 아침/현미잡곡밥·무 다시마국· 콩조림·들쑥 무침·열무김치·오이·당근·생과일. 토요일 저녁/현미밥·양배추 된장국·파전·취나물·백김치·건포도 땅콩 조림·생과일(건강동호회 '채식나라' 제공). 자신이 다른 음식을 더하거나 빼면서 1주일치 식단을 짜서 시행하면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채식의 성공 비결은 맛있고 즐겁게 먹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공복감이 느껴져 허전할 때가 많다. 그만두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해지기도 한다. 환경·채식 운동가 한경숙씨(48)는 "가급적 채식을 많이 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빵이나 삶은 감자를 먹으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라고 말한다. 고기맛에 대한 욕구를 참지 못하는 사람은 밀고기·콩고기나, 고기 대용식으로 파는 식물 햄이나 베지버거(Vegeburger)를 섭취한다(76쪽 상자 기사 참조). 이때 양념장이나 천연 조미료를 곁들이면 입맛을 돋울 수 있다. 된장·고추장에 콩·견과류·다시마 가루 등을 넣으면 맛깔스러운 영양 양념장이 된다.

해초류를 섞어 먹어도 입맛을 돋울 수 있다. 미역·김·다시마 등에는 몸에 좋은 칼슘과 미네랄이 다량 들어 있어, 영양 불균형도 막아준다. 견과류도 입맛을 돋우고, 영양 보충을 해준다. 땅콩·호도·아몬드에 들어 있는 불포화 지방산은 혈액 속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것으로 소문 나 있다. 들깨·참깨·은행 같은 종실류도 마찬가지이다. 단백질의 보고인 검은콩·완두콩은 날것으로 먹기 힘드므로 두부나 콩가루로 만들어 자주 먹는다.


스스로 재료 구입해 요리하면 빨리 익숙해져


입맛에 상관없이 채식에 빨리 적응하는 요령이 있다. 우선 다른 사람이 차린 음식을 먹기보다, 스스로 재료를 구입하고 다듬고 요리해 먹는다. 의외로 몸과 마음이 활기차진다. 채식 요리책 두세 권을 보기 편한 곳에 두고 수시로 꺼내 본다. 자연 식품점과 채식 식당에 들러 보거나, 채식 동호회·채식 요리 강습 등에 참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나 집에서 아무리 꼼꼼히 채식을 해도 바깥에 나가면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다. '위험'에 처하지 않으려면 부지런한 사람은 집에서 현미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거나, 햄·달걀 따위를 넣지 않은 김밥을 말아 가지고 다닌다. 할 수 없이 식당에 가더라도 비빔밥이나 고기·동물성 지방이 없는 음식을 골라 먹는다.

현재 인간이 섭취하는 식품의 90%는 산업적 가공을 거친 식품들이다. 덕분에 소비자들은 이제 굳이 야채 조리법을 배우고,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식품들이 인류에게 주는 해악은 알려진 대로 너무 크다. 이제 생명과 생태계, 그리고 자신의 건강을 생각해 야채와 곡식을 씻고, 그것을 재료로 식탁을 풍성하게 꾸밀 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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