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 신·박세리 LPGA 정복… 박지은·김미현도 ‘제2의 한국 돌풍’ 예고
이번에는 큰언니가 ‘사고’를 쳤다. 재미 교포 펄 신(31·한국 이름 신지영)이 8월30일 미국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 레일 골프 코스에서 막을 내린 98 스테이트 팜 레일 클래식 대회에서 프로 데뷔 8년 만에 처음 LPGA(미국 여자 프로 골프) 투어에서 우승한 것이다. 3라운드 합계 16언더파. 상금 10만5천 달러.펄 신이 골프를 처음 접한 것은 다섯 살 때. 77년 미국으로 이민 간 펄 신의 가족이 자리잡은 곳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인근 골프장 근처였다. 펄 신은 아버지가 골프장·커피숍 주인, 골프 코치로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골프채를 만지게 되었다.
“골퍼로 키우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다만 이질 문화에 적응시키는 한 방법으로 골프를 생각했다.” 아버지 신재호씨(59)의 말이다.
이주은·서지현, 부상 딛고 상승세
그런데 펄 신은 의외로 골프를 잘 쳤다. 미국 골프가 세계 골프이고, 캘리포니아 골프가 미국 골프라고 생각해 온 아버지는 딸이 79년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세계 주니어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자 ‘하면 되겠구나’하고 확신했다.
아마추어 시절 펄 신은 꽤 잘 나갔다. 88년 아마추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US여자선수권대회를 석권했으며, 그 해 4대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인 퍼블릭 링크스 대회까지 휩쓸었다. 지금까지 이 두 대회를 같은 해에 우승한 선수는 펄 신뿐이다. 또 같은 해 커티스 컵 및 월드컵 미국 대표를 지내는 등 승승 장구했다.
90년에 프로로 데뷔한 그녀는 곧바로 LPGA 우승을 차지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우승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94년 10월 허틀랜트 클래식에서 우승한 것이 고작이었다. 또 95년 자동차 사고로 목·어깨를 다쳐 한때 은퇴를 생각하기도 했다.
정상 도전에 자신을 얻은 것은 올해 초부터였다. 세계적 티칭 프로 데이비드 레드베터에게 지도를 받으며 골프에 대해 새롭게 눈뜬 것이다. 예리한 퍼팅을 되찾은 지난 7월 박세리가 우승한 자이언트 이글 클래식에서 4위에 오르면서 정상을 넘보기 시작했고, 이번에 우승을 차지했다.
펄 신의 첫 LPGA 우승은 한국이 명실공히 골프 신흥 강국으로 떠오를 계기를 마련했다. 올해 4승을 올린 박세리라는 필마단기로 버텨 왔는데, 여기에 경험 많고 왕년의 기량을 되찾은 펄 신이 가세함으로써 LPGA 출전 국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박세리·펄 신 외에 LPGA에 등록된 이주은·서지현도 부상 후유증을 씻고 오름세를 보여 힘을 더해 주고 있다.
LPGA 진출 4인 가운데 선두 주자는 역시 박세리. 프로 경험이 짧고 쇼트 게임에 약한 점이 지적되지만 ‘슈퍼 베이비’로서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펄 신이 우승한 스테이트 팜 레일 클래식에서는 비록 공동 10위에 그쳤지만 나름의 성과도 있었다. 우승 아니면 30위권 즉 ‘모 아니면 도’식의 성적 널뛰기에서 탈출한 것이다.
박세리 못지않은 기량을 지닌 박지은(19·애리조나 주립 대학)이 언제 프로에 데뷔할 것인가도 큰 관심사다. ‘동양의 아마조네스’로 통하는 그는 비거리가 남자 못지않은 3백 야드를 기록하는 골프 천재로, 올해 아마추어 메이저 대회 4개 중 3개를 석권했다.
한희원·강지민, 차세대 강호 ‘예약’
그를 여러 번 취재한 로스앤젤레스의 한 교포 신문 기자는 “엄청난 파워에 세기까지 갖췄다. 박세리보다 못할 게 없다. 흠이라면 집안이 부자여서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고 연습을 게을리한다”라고 말한다. 박지은은 올해 LPGA 프로 테스트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년 프로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위에서 프로행을 부추기는 사람이 많아 또 하나의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또 다른 히든 카드는 한국 랭킹 1위인 ‘땅콩’ 김미현. 박세리와 함께 한국 골프계를 양분했던 그는, 올해 LPGA 프로 테스트 1차 예선을 가뿐히 통과해 내년부터 LPGA에서 또 한차례 한국 돌풍을 일으킬 주역으로 기대된다.
또 일본 프로 무대 평정에 나선 한희원도 내심 LPGA 진출을 학수 고대하고 있다. 주니어 골퍼 강지민(시애틀 킹스 하이스쿨)도 최근 미국 주니어 대회인 폴로 선수권대회에 이어 핑 피닉스 대회까지 잇달아 우승해 차세대 강호로 떠올랐다.
현재 LPGA 무대에서 뛰고 있는 주요 국가 그룹은 미국·스웨덴·영국·호주·일본 정도. 낸시 로페스·베시 킹·도티 페퍼 같은 미국 선수가 주도하던 LPGA 투어는 3∼4년 전부터 애니카 소렌스탐·리셀로테 노이만·헬렌 알프레드슨이 이끄는 스웨덴 그룹에 정복당했다. 호주의 케리 웹, 영국의 로라 데이비스, 일본의 고바야시가 좋은 성적을 올리기도 했으나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LPGA 투어는 한국 낭자들이 선전함에 따라 커다란 판도 변화가 예상된다.
골프는 심리 게임이다. 우수한 한국 선수들이 많이 출전한다고 꼭 우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승 확률은 1∼2명에 의존할 때보다 높을 것이다. 한국의 낭자군이 부자의 스포츠, 백인 스포츠라는 골프 이미지를 바꾸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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