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권하는 세기말, 술 깨는 해법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9.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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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깨는 음료, 밀레니엄 특수 겨냥해 줄지어 출시… 효능 놓고 의견 분분
수필가 조지훈 선생은 술꾼의 품격을 나누면서, 술을 마실 줄 알되 취하기를 겁내는 사람을 민주(憫酒)라 분류했다(<주도유단>). 이른바 ‘밀레니엄 망년회’로 온 나라가 달아오르면서 숙취 해소 음료를 찾는 민주꾼이 점점 늘고 있다.

두통·메스꺼움·속쓰림·나른함. 술 마신 다음날까지 취기가 이어진다 하여 일본에서는 이일취(二日醉)라고도 부르는 이 고통스러운 숙취를 이겨내기 위해 술꾼들은, 술을 마시기 전 또는 마신 직후 숙취 해소 음료를 찾는다. 숙취 해소 음료란 말 그대로 알코올을 쉽게 분해하고, 신진 대사를 촉진하는 물질을 함유해 음주로 인한 부작용을 예방하거나 완화하는 기능성 음료.
‘여명 808’ 등 신상품, ‘컨디션’에 도전장

이 중 단연 돋보이는 제품이 제일제당 ‘컨디션’이다. 옛 조상이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쌀뜨물을 마신 데 착안해 쌀눈에 있는 구루메 성분을 추출해 만들었다는 컨디션은, 93년 국내 최초의 숙취 해소 음료로 첫선을 보인 이래 6년이 지난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맏형’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음료는 출시한 지 1년 만에 천만 병, 3년 만에 1억 병이 팔렸으며, 99년 11월 현재 1억7천만 병이 넘게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컨디션이 대성공을 거두자 아스파(대상)·솔표비즈니스(조선무약)·알지오(두산)·비전(LG) 같은 유사 음료가 뒤를 이어 쏟아져 나왔다. 이들 음료는 콩나물에 있는 아스파라긴산, 식물 엑기스를 발효시킨 바이오짐, 갈화·굴피를 포함한 천연 생약 성분 따위를 내세우며 서로 다른 개성을 뽐냈다. 이들이 ‘황금 시절’이라고 회고하는 96년 숙취 해소 음료 시장은 천억 원 규모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는 이들에게 호된 시련을 안겨 주었다. 소줏값조차 아쉬운 술꾼들이 소주보다 비싼 숙취 해소 음료(당시 2천5백∼3천5백 원)에 손을 뻗칠 리 만무했다. 시장은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이 과정에서 컨디션·아스파·솔표비즈니스를 제외한 나머지 제품은 대부분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재고를 정리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경기가 살아나면서 상황은 다시 뒤집히고 있다. IMF 이후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하며 사실상 독과점 지위를 누리고 있는 컨디션은 올 들어 ‘컨디션 F’라는 새 제품을 내놓고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컨디션 F는 기존 구루메 성분에 양송이 버섯에서 추출한 샴피니언 성분을 첨가한 제품. 샴피니언 성분은 인돌류·암모니아 가스 따위 음주 뒤 발생하는 체내 독소를 신속히 분해하며, 술 마신 다음날 몸에서 나는 악취를 없애는 기능이 특히 탁월하다는 것이 제일제당 유광렬 과장(제약본부 마케팅팀)의 설명이다.

콩나물 뿌리에 듬뿍 들어 있는 숙취 해소 성분(아스파라긴산)을 추출해 상품화함으로써, ‘술독을 푸는 데는 역시 콩나물 국’이라는 술꾼들의 믿음을 확인시켜 주었던 아스파도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한때 출시를 중단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던 아스파는 올 들어 간장 보호·피로 회복 기능을 강화한 새 음료 ‘아스파 S’를 내놓고 ‘영광이여, 다시 한번’을 외치고 있다. 아스파는 기존 드링크제뿐만 아니라 캡슐과 PET 포장 형태로도 나오는데, 이들 제품 판매에 주력해 ‘숙취를 없애줄 뿐 아니라 간장까지 보호해 주는’ 복합 효능 식품 이미지를 심겠다는 것이 (주)대상의 복안이다.

올 들어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 또한 숙취 제거 음료 시장에 새로운 판도를 예고하고 있다. 이 중 조용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제품이 ‘여명 808’이다. 올 초 대대적인 선전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이 제품은 오리나무가 주된 원료이다.

(주)그래미 남종현 회장(55)은 간경화에 걸린 동생을 치료하다가 ‘오리나무를 술에 담그면 술이 물이 되고, 간 기능 회복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옛 문헌 구절에 눈이 번쩍 뜨여 이 제품을 직접 발명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808’은 제품 개발에 성공하기까지 거친 실험 횟수를 나타낸다.

박카스·요쿠르트도 숙취 해소에 도움

폭탄주를 마신 다음날이라도 여명 808을 두 캔 마시면 거뜬한 몸으로 출근할 수 있다는 남회장은, 이 제품으로 지난 5월 제15회 피츠버그 국제 발명품 전시회에서 세계 발명가 대상을 포함해 3관왕을 차지했다. 병당 5천 원이라는 높은 소매가에도 불구하고 여명 808은 하루 2만 캔 가까이 팔려 나가고 있다는 것이 (주)그래미측 설명이다. ‘여명 808을 코카콜라 같은 세계적인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남회장의 야심에 따라, 지난 1년간 이 제품의 수출 대 내수 비율은 5 대 1에 이른다.

강원대 식품생명공학부 이현용 교수팀 또한 숙취 해소에 탁월한 효능을 나타내는 음료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오리나무·지구자나무·칡 따위에서 추출한 액을 혼합해 쥐에 투여한 결과 혈중 알코올 농도가 90% 가까이 감소하는 효과를 보였다는 것이 이교수의 실험 결과이다. 알코올과 작별한다는 뜻에서 ‘바이콜’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음료는 12월 중순부터 시판될 예정이다.

단 바이콜은 출시하기도 전에 분쟁에 휘말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오리나무 추출액을 사용한 것이 특허 침해 행위라며, (주)그래미가 바이콜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할 방침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리나무는 원료 가운데 하나일 뿐, 바이콜은 여러 식물체 추출물을 적정 비율로 혼합함으로써 알코올 분해 능력을 한층 강화한 독자적 발명품이라는 것이 이교수측 설명이다.

그렇다면 숙취 해소 음료는 과연 효능이 있는 것일까. 제조회사들은 저마다 유명 연구 기관에 의뢰해 얻은 임상 실험 결과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구루메·아스파라긴산 따위가 알코올 분해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문제는 그 함량이다’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몇 천 원짜리 음료 한 병에 알코올을 충분히 분해할 만한 양을 넣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숙취는 기본적으로 당분과 수분이 부족해 발생하므로, 숙취 해소는 이들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만으로도 일정 효능을 발휘한다’는 것이 경희의료원 가정의학과 원장원 교수의 지적이다. 실제로 숙취 해소 음료에는 숙취 해소 성분 외에 과즙·정백당·비타민·무기질 따위가 함께 들어 있다. 이같은 원리로 박카스 같은 일반 드링크제, 요쿠르트 제품 또한 숙취 해소 효과를 발휘한다.

경원생명과학연구소 박영철 박사(독성학)는 또 다른 시각에서 기존 숙취 해소 음료를 비판해 눈길을 끈다. 숙취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려면 ‘간’보다 ‘뇌’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숙취가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알코올 자체가 아니라, 알코올이 분해되면서 아세트알데히드라는 1차 대사 물질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아세트알데히드는 뇌에 산화적 손상을 유발해 두통을 일으킬 뿐더러 뇌의 노화까지 촉진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숙취 해소는 뇌의 아세트알데히드를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박영철 박사는 주장한다. 이에 반해 기존 숙취 해소 음료는 간의 알코올 분해 효소를 활성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한번 손상된 간은 최소한 3일이 지나야 회복될 뿐더러, 백만여 가지 효소가 공존하는 간을 단기간에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경원생명연구소는 현재 은행잎 추출물과 오징어에 다량 함유된 타우린 성분을 이용해 숙취를 제거하고 뇌의 산화적 손상을 억제하는 정제를 개발하고 있다.

밀레니엄 특수를 앞두고 다시 기지개를 켜는 숙취 해소 음료 시장. ‘믿는 구석’이 많아질수록 술꾼들은 즐거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근본적인 숙취 해소법은 ‘술 앞에 장사 없다’는 격언을 되새기는 길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할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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