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양복을 입고, 거의 대부분이 아파트에 살게 되었고, 마침내 ‘세계화’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자, ‘전통’과 ‘토종’이라는 말이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생활 한복’이나 ‘황토방’ 같은 것들이 우리 고유의 것이라는 탈을 쓰고 인터넷 시대, 벤처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등장하기도 한다.
어릴 적부터 시골에서 보아온 맨드라미가 마땅히 우리 것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 꽃의 고향이 열대 지방이라는 것을 알고는 적지 아니 실망했다. 시골집 마당가에 흔한 채송화도 그렇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국적인 모습이 없지 않지만, 그 이름들이 우리 토속어 비슷해서 속은 것이다. 코스모스처럼 원래 이름을 달고 있다면 아무리 어릴 적부터 보아 왔다 하더라도 토종이 아님은 누구나 알았으리라. 알고 보면 우리가 마당이나 화분에서 키우며 완상하는 나무나 화초 들은 거개가 다른 나라들―조선 때는 중국에서, 그 뒤에는 서양 여러 나라에서 ‘벤처’들이 들여온 것이다. 문화란 묘한 것이어서 식물들도 거느리고 다닌다. 그런데 우리 것 내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우리나라 산과 들에 저절로 자라는 토종은 두어 가지를 빼놓고는 다 ‘이름 모를’ 풀이나 꽃이다.
요즘은 새 건물을 지었다 하면 어김없이 ‘우리’ 소나무를 심는다. 십 몇 층짜리 빌딩을 보고 서양식 건물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거기에 들러리 선 소나무를 보고 우리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말하자면 ‘세계화’다. 고층 아파트들은 우리의 도시나 시골을 차별하지 않고 다 공평하게 공격한다. 뿐만 아니다. 우리가 주로 말로만 집착하는 ‘우리의 전통’ ‘우리의 토종’까지도 공격한다.
맨드라미꽃이 피어 있는 장독대는 빛을 잘 받아들여서 오히려 빛을 느끼기 어렵다. 그러나 황토벽에서는 얼룩진 그림자 때문에 빛이 더 빛난다. 늦가을 기운 햇살이 황토벽 위에서 지나가는 바람에 일렁댄다. 이제 곧 장독대도, 황토벽도 고층 아파트 그늘에 잠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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