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생태 ‘나이테’가 한눈에
  • 안은주 기자 (anjoo@e-sisa.co.kr)
  • 승인 2000.12.1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습지보호지역 지정된 제주 물영아리 오름 현장 탐사/희귀 식물·곤충 천연 요람 형성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읍 수령산(508m) 일대 물영아리 오름(기생 화산)을 찾은 때는 11월 말이었다. 물영아리 오름이 12월5일부터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지난해 2월 습지보전법이 제정된 뒤 현지 생태 조사를 거쳐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것은 물영아리 오름이 처음이다.

제주도의 조사에 따르면, 제주도의 오름 3백68개 가운데 백록담처럼 산꼭대기에 화구호를 갖고 있고, 지형 지질이 특수하거나 경관생태학적으로 우수한 기생 화산은 9개 정도이다. 그 가운데 물영아리 오름은 제주도 기생 화산의 대표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데다 전형적인 온대 산간 습지의 특성을 갖고 있어, 생태학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높다고 환경부 임종현 과장(자연생태과)은 말했다. 환경부는 물영아리 오름의 생태적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1998년과 1999년에 모두 다섯 차례 현지 조사를 실시했다.

제주임업시험장 김찬수 박사의 안내를 받으며 찾아간 물영아리 오름에는 늦가을 정취가 가득했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들이 오름 전체를 덮고 있었고, 오름 탐사가들의 발길로 선명해진 등산로에서는 뒤늦게 피어난 들꽃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물영아리 오름은 겉둘레가 약 1km이고, 화구호는 둘레 300m, 깊이 40여m에 달하는 함지박 형태이다. 현무암질 용암이 분출해 생긴 기생 화산으로, 오름 안팎에는 ‘송이’라고 불리는 화산쇄설물이 널려 있다. 화산 분출 뒤 풍화작용과 침식작용이 거듭되면서 분화구 안쪽으로 미립질의 흙이 흘러들어 토양이 이루어졌다.

속이 움푹 팬 분화구 안쪽은 바짝 마른 수초로 메워져 있었다. 김찬수 박사는 “요즘 같은 건조기에는 습지를 형성하고 있다가 집중 호우가 내리거나 장마철이 되면 수위가 1m까지 올라가는 것이 물영아리 오름의 특징이다”라고 설명했다. 물영아리라는 이름도 ‘비가 내리면 물이 고여 연못이 된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것이다.
마른 수초로 덮여 누르스름한 못 바닥은 한 발 내디딜 때마다 푹푹 빠질 정도로 물이 흥건했다. 연못 중앙에는 물이 제법 많이 고여 있어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다. 작은 운동장만한 크기인 못 바닥과 주변에는 습지 식물과 육지 식물들이 ‘네 땅 내 땅’을 사이좋게 나눈 듯이 군락 경계선을 뚜렷이 드러냈다. 연못 주위에는 습지 식생인 보풀과 세모고랭이·고마리 등이 연못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환경부 자연생태조사단 연구에 따르면, 이 밖에도 물여뀌·가막사리·넓은잎미꾸리낚시·개기장·모기방동사니·누운기장대풀·골풀·네모골 등이 자란다. 특히 물여뀌는 물속과 습지 주변에서 동시에 자라는 식물로 현재 경남 창녕의 우포늪과 울산 주변 습지에서만 발견되는 희귀 식물이다.

연못과 맞닿은 분화구 안쪽 경사면에는 참식나무·꽝꽝나무·줄사철나무·참꽃나무 등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고, 간혹 복수초와 곰취도 보였다. 환경부 생태조사단 김철환 박사에 따르면, 분화구 안쪽 경사면은 물영아리 오름 전지역 가운데 자연적인 상태를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오름의 바깥쪽 능선부에는 참식나무와 서어나무가 고루 자라고 있었다. 능선 초입부에는 1970년대 조림 사업 때 심은 삼나무가 빽빽했다. 환경부 생태조사단 연구에 따르면, 능선부 주변에는 제주도와 울릉도에서만 자라는 덩굴용담이 퍼져 있다. 이 오름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 가운데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으로는 제주도에서만 자라는 새끼노루귀·제주피막이·참꽃나무·방울꽃, 거제도와 제주도에만 있는 개승마를 꼽을 수 있다.
제주도청·자연보전협회 조사에 따르면, 물영아리 오름에는 환경부가 지정한 보호 대상 곤충인 물장군을 비롯하여 곤충 47종, 참개구리·도마뱀 등 다양한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환경부 자연생태조사단 차진열 박사는 “특히 물장군은 다른 지역 종들과는 유전적으로 다를 가능성이 높아 유전자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물영아리 오름을 둘러본 김찬수 박사는 습지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육지로 변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못 바닥에는 습지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지만, 그 주변으로 육지 식물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물영아리 오름에서는 육지화 과정을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습지 중앙부에 습생 식물이나 수생 식물이 동심원상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자연 환경 변화에 따른 습지 생태계를 관찰하기에 좋아 살아 있는 박물관이나 다름없다”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물영아리 오름과 같은 분화구내 습지는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어 희소 가치가 크다는 것이다.

최근 1, 2년 사이 ‘오름 탐사’ 붐이 일어 물영아리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발길에 채인 능선 곳곳에 등산로가 생기고 그 주변이 급격하게 훼손되고 있었다. 탐사객들은 습지 주변까지 마구 드나들어 주변 식생 또한 짓밟았다. 환경부가 서둘러 습지보호 지역으로 지정한 것도 사람에 의한 훼손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12월5일부터 물영아리 오름은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일반인은 들어갈 수가 없다. 물영아리 오름에서 동식물은 물론 흙과 모래·자갈·돌 따위의 채취도 일절 금지된다. 환경부 황상연씨(자연정책과)는 “우선 오름 관리인을 선발하고, 안내 표지판을 세운 다음 내년에 물영아리 보존 관리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