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멧 효과, 스키장에서도 통한다
  • 전상일 (환경보건학 박사, www.eandh.org) ()
  • 승인 2005.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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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발생빈도 현저히 줄여…‘위험 보상 가설’과는 거리 멀어
스키장 안전 사고가 급증하고 있다. 한국소비자보호원에 따르면, 2001년 1백14건이던 사고 건수가 2004년에 3백25건으로 늘어났다. 스키 인구 증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시설, 안전 의식 부재 등이 빚어낸 합작품이다. 인구 밀도가 높은 우리 나라 스키장에서 무게 중심과 진행 방향이 다른 스키와 스노보드를 함께 타도록 한 것이 새로운 위험 요인으로 등장했다.

스키장에서 ‘재미’와 ‘안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수는 없을까? 스키장을 더 지어 이용객의 밀도를 낮추고, 안전시설을 보강하고, 이용객 모두가 안전 수칙을 준수하는 것이 근본 해결책이다. 그와 더불어 개인용 보호 장비의 착용도 필수이다. 특히 머리를 다쳐 사망하는 사고가 빈발하면서, 스키장에서 헬멧을 착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미 일부 스키장에서 이를 시행하고 있다. 사이클링과 인라인스케이트에 이어 스키에서도 헬멧이 필수품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스키어와 스노보더에게 헬멧 착용을 의무화한 것은 스키 문화의 원조 격인 북유럽과 북미 지역 학자들의 연구에서 비롯했다. 연구 결과 헬멧을 착용한 사람은 머리와 목이 심하게 다치는 정도가 현저히 낮았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헬멧 효과’에 대해 딴죽을 거는 ‘대항 가설’이 등장했다. 이른바 ‘위험 보상(risk compensation)’가설이다.

교통 안전 분야에서 제기된 이 가설은 자동차 안전 장치를 과신한 나머지 더 큰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골자이다. 이를 스키장 안전 문제에 적용하면, 헬멧 착용이 머리의 부상 위험을 줄여준다는 점을 인식한 스키어들이 이를 믿고 더 과격한 활주와 과속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고, 이로 인해 머리와 목 이외의 신체 부위는 더 많이 다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전 문제에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이 충돌할 수 있다는 전제이다.

캐나다 연구진 “헬멧 믿고 과속한다는 주장은 근거 없어”

하지만 위험 보상 가설이 스키장 헬멧 착용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최초로 발표되었다. 캐나다 맥길 대학 연구진은 <사고 분석과 예방> 학회지 최신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2001년 11월~2002년 4월 캐나다 퀘벡 주에 있는 19곳의 스키장 순찰대에 보고된 부상자 4천6백67명 중 3천2백95명을 대상으로, 헬멧 착용 여부와 머리·목 이외의 신체 부위에 입은 부상의 정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헬멧 착용이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게 할 수 있다는 위험 보상 가설이 들어맞으려면, 헬멧을 쓴 사람들이 오히려 머리와 목 이외의 기타 부위를 더 심하게 다쳤다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분석 결과는 달랐다. 기타 부위에 심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간 사람이나 가벼운 부상자 중에서 헬멧을 쓴 사람과 쓰지 않은 사람의 비율이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과속을 하거나 고난도로 과격하게 타거나 점프하다가 다친 비율 역시 헬멧 착용 여부와의 연관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헬멧만 믿고 위험한 곡예에 몸을 내맡기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여러 가지 정황 증거를 고려할 때 이제 우리 나라에서도 스키어와 스노보더 들에게 헬멧 착용을 강제해도 좋을 듯싶다. 머리에 씌워진 헬멧이 인간의 이성이 흔들리지 않도록 바로잡아 주는 경고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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