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공화국’ 시민의 소망
  •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 승인 2002.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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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시험을 앞두고 아파트 내부 수리나 결혼식 함 등 쾌적한 교육 환경을 저해하는 일체의 활동을 11월5일까지 금지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필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옆 게시판에 한 달 가량 붙어있던 안내문이다.






일전에 ‘대학입시와 가족’을 주제로 입시 위주 교육제도가 정상적인 가족 생활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자료를 수집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50대 초반 가장의 실화 한 토막.



평소보다 일찍 귀가한 어느 날, 배가 출출해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과일이 맛깔스럽게 접시에 담겨 포장되어 있더란다. 무심코 접시를 꺼내 과일 한 조각을 집어들었는데, 마누라가 달려오더니 “우리 아들(물론 수험생) 간식인 것 몰라요?” 하며 얼른 과일 접시를 빼앗아 가더란다. 순간 ‘돈 벌어다 주고도 과일 한 조각 마음대로 못 먹는 나는 이 집안에서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서러움이 밀려오더라는 것이 가장의 고백이었다.



교육비 늘어나는데 학력은 하강 곡선



집안에 수험생이 있는 동안은 때로 제사도 생략하고 일시적으로 노부모 부양도 면제되는 나라, 수능시험 1주일 전쯤 해서는 유흥업소가 한산해지고 영화관·서점의 매출액이 눈에 띄게 감소하는 나라, 수능 고득점을 위해 전국의 사찰과 교회에서 간절한 기도와 기원이 끊이지 않는 나라, 수능시험 당일 ‘듣기 평가 시간’에는 비행기 이·착륙을 금하는 나라, 심지어 명문 입시학원이 아파트 가격의 오름세를 주도하는 나라. 이쯤 되면 ‘수능 공화국’이라고 불러 손색이 없을 듯하다.



한데 이토록 온 국민이 열과 성을 다해 수능시험에 매달려 보지만 정작 우리 자녀의 학력 수준은 해마다 하강 곡선을 그린다. GNP 대비 교육비 투자율이 세계 1, 2위를 다투지만 우리의 명문 대학 이름을 세계 100대 대학 순위에서 찾기는 여전히 요원하다. 분명 자녀의 효용 가치는 감소하고 있는데 ‘과잉 모성’이라는 비난을 무릅쓴 채 되돌려받지도 못할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우리의 부모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녕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는 맥 빠진 주장을 반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인생의 성패가 수능 성적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요, 수능 성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란 우리 자녀들이 가진 잠재력의 극히 일부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현실에서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삶의 기회가 상당 부분 결정되기에 누군들 감히 수능 성적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이 상황에서 천문학적 규모의 사교육비를 공교육 현장으로 돌려야 한다는 지극히 당위적이기는 하나 실현될 가능성은 제로인 주장을 되풀이하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 다만 우리의 입시 위주 교육을 고비용 저효율에서 저비용 고효율로 전환할 묘안이 없는 다음에야 차선책으로 ‘고비용 고효율’ 구조로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출발해 보자는 것이다.



“요즘 대학 졸업생들은 불량품이다. 우리가 라디오를 하나 사도 불량품은 교환이 가능하지만 사람 불량품은 교환조차 불가능하다”라던 대기업 인사 담당자의 푸념을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지 않은가. 가족 전략 차원에서 과도한 희생을 무릅쓰고 기꺼이 투자한 교육비는 온데간데없고, 대학 교육 현장에서는 오늘도 날개조차 없이 추락하고 있는 학력 저하의 참담한 현실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더 방관할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면서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엄마 감독·수험생 주연·아빠 조연’ 입시 드라마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혹, 자녀의 대입과 직결된 문제라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머리띠 두르고 시위도 마다하지 않는 우리 엄마들이 '제대로만' 나선다면, 누군가 사교육 시장의 경쟁력을 공교육 현장에 벤치마킹할 수 있는 묘안을 내놓는다면, 대학입시 제도를 과감히 대학의 자율적 판단에 맡긴다면…. 잠시 몽상에 젖어 보지만 마음은 우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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