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을 지키려는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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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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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편지가 왔다. 발신인은 우표 옆에 우표와 크기가 똑같은 자기 얼굴 사진 한 장을 붙였다. ‘용산을 사랑하는 사람들-21세기 용산포럼 성장현’이 발신인이다. 성장현이라면 용산 주둔 미군사령부(미8군)에 불법 건축물을 철거하라고 최후 통첩을 했던 용산구청장 아닌가(2001년 12월27일자 시론 ‘양키여, 덕수궁 길을 열거라’ 참조).





지난 주말, 성장현 전 구청장은 나의 면담 요청에 응했다. 나는 그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보는가, 선거법을 왜 위반했는가 알고 싶었다.
그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는 때에 맞추어 한·미 당국이 용산기지 안에 미군 아파트 건물 2개 동을 신축하기로 합의한 것을 매우 비판적으로 본다. 결국 미8군은 계획한 대로 용산 땅에 1천66세대분 21개 동을 다 짓고 말 것이라고 걱정한다. 둑에 구멍이 한번 뚫리면 온몸으로 막아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비유였다. 계산된 미국의 실리 추구는 그렇다 치고, 더 문제인 것은 미국의 실리를 위해 앞장서는 한국 위정자와 지도층이다.





성장현씨가 현직에 있던 1999년 초, 독일대사관이 관내인 이태원 캐피탈호텔 앞 4층 건물에 이전했다. 독일대사관은 지상 1층 주차장을 쉼터 찻집으로 용도 변경을 하고 싶어했다. 클라우스 휠러 대사는 직접 구청장에게 허락을 구했다. 성구청장은 치외법권 지역인 대사관 건물에 한국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면 국익에 좋다고 판단하고 재량으로 동의했다. 그런데 외교통상부는 “무단으로 주차장의 용도 변경을 해주면 안된다”라고 유·무형의 압력을 가해왔다.



성구청장은 같은 해 미8군이 용산기지 안에 지상 6층 지하 1층짜리 호텔을 무허가로 지을 때는 외교통상부가 독일대사관 건과는 사뭇 다른 잣대를 적용했다고 개탄한다. 성구청장이 주한미군 사령관(미8군 시설공병대대장) 앞으로 2000년 3월 말까지 적법 절차를 밟지 않으면 물리력을 동원해서 강제 철거에 나서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내자, 외교통상부는 서울특별시를 통해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왔다.


‘미군측은 건축법에 따라 용산구청과 협의하거나 용산구청의 허가를 받을 법적 의무가 없다’는 ‘자상한’ 해석(수신 서울특별시장, ‘미군기지 내 건축행위관련 SOFA규정에 대한 우리부 의견’, 2000년 3월20일자 외교통상부장관 발신)을 내린 것이다. 그는 미8군이 용산기지에 아파트를 짓게 된 것은 반드시 짓게 해주려는 한국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다고 본다.



그는 반미주의자도 아니고 운동권과도 전혀 무관하다. 1991년에 평민당 내천으로 용산구 의원에 당선한 그는 구의원 활동을 계속한 끝에 1997년 민주당 공천으로 구청장에 당선했다. 그는 일선 행정 업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미국측이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을 찾아서 바로잡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성장현 구청장이 자리를 물러난 것은 최후 통첩을 보낸 다음 달인 2000년 4월25일이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은 그는 1, 2, 3심에서 검사의 구형량 대로 10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고 선출직 구청장 자리를 잃었다.



그는 선거법 위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선거 한 달 전에 내가 <국민일보> 용산지국 후원회장에 취임한 것을 축하하여 순복음교회 용산교구 목사님·장로님과 용산 관내 6개 지국장이 함께 예배를 보았다. 저녁 식대 44만원을 내가 내려고 한 것이 죄가 되어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고 용산구청장 직에서 물러나 지금은 단국대학교 행정학 박사 과정을 밟으며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법은 약속이므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과오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자기가 미군 문제에 강하게 부딪쳐 보수층에 위험 인물로 부각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학위 논문 주제는 ‘한·미 행정협정에 관한 연구’인데 벌써 거부감을 느끼는 교수가 있어 고충을 느낀다. 성장현 전 구청장은 공직자로서 법을 공정하고 정당하게 집행하려다가 부대낀 사람이다. 법을 지키던 그가 선거법 위반으로 선출직을 잃은 것에서 한국 정치의 모순과 좌절을 본다.
안병찬
(<시사저널> 편집고문
·경원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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