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살 먹어치우는 ‘시네마 지옥’
  • 吳允鉉 기자 ()
  • 승인 1995.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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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잡이 수입 경쟁으로 외화 값 천정부지… UIP “직배가 오히려 손해” 철수설
지난 봄에 개봉됐던 UIP 직배 영화 <작은 전쟁>은 감독과 배우, 그리고 영화 자체에 흠잡을 데가 많지 않은 작품이었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만든 존 애브넛이 감독했고,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을 맡았다. 시사회장을 나선 평론가들은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 ‘진지한 반전 영화’라고 호평했다. 누구도 객석이 텅 비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전쟁>은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충무로에 ‘UIP가 철수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국 시장에 상륙할 때 거센 반발을 샀고, 그 반발을 증명이라도 하듯 UIP 는 그동안 <사랑과 영혼> <쥐라기 공원> <트루 라이즈> <포레스트 검프> 등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관객들의 입맛이 할리우드 영화에 길들여 있지 않은가. 그런데 철수를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인들은 UIP 철수설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평론가 이세룡씨는 UIP 철수설의 한 단서로 <작은 전쟁>이 흥행에 실패한 것을 예로 든다. “<작은 전쟁>은 대승이 예상됐던 영화였지만 서울 개봉관에 관객이 4만도 안들었다. 만약 존 애브넛과 케빈 코스트너를 미끼로 한국 영화사에 팔았다면 훨씬 많은 수익을 올렸을 것이다.” 이씨의 ‘예언’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한국에 직배사를 둔 20세기 폭스는 올해 자체 제작한 <다이하드 3>을 직배사를 거치지 않고 한국 영화사에 2백80만달러를 받고 팔아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이 영화는 올 여름에 개봉되었으나 역시 흥행에 참패했다).

UIP 철수설은 얼핏 박수를 보낼 만한 뉴스 같지만 속내를 알면 사정은 달라진다. UIP가 결코 한국 영화를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자사의 이익을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직배 영화 상영 저지에 적극 나섰던 영화인들이 그 소문을 반기기는커녕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영화감독 정지영씨는 “만약 UIP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이미 한국 영화 시장의 약점을 파악했다는 얘기다. 우리로서는 공동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11월10일 현재까지도 UIP는 철수설을 부인하고 있다.

한국은 외국 배급사들의 ‘봉’

UIP가 한국 영화 시장에 첫발을 디딘 때는 88년. 그동안 얼마나 벌었을까. UIP의 대차대조표를 들여다보면 철수 가능성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올해 문화체육부가 국회 박종웅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8년간 UIP는 수입을 6백42억9천6백여만원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전체 수입 면에서 보면 한국의 외화 수입업자들에게 파는 것보다는 덜 번 것으로 보인다.

88년부터 지난해까지 UIP가 직배한 영화는 모두 95편, 그 영화를 보러 온 관객 수는 3천4백7만4천여 명이었다. 한 해 평균 13.5편을 직배했고, 한 편당 평균 36만 관객이 들었다.

95편 가운데에는 <사랑과 영혼> <쥐라기 공원> <쉰들러 리스트> <트루 라이즈> <포레스트 검프>같이 백만명 이상 관객이 든 작품이 있는가 하면, <킬러 나이트>(6천9백94명) <사랑의 동반자>(1만6천백78명) <비버리힐스 캅 3>(2만9천4백11명, 이상 94년 서울 개봉관 기준)처럼 관객이 3만명에도 미치지 못한 영화도 있었다. 당연히 영화마다 수입도 천차만별이다. 7년간 UIP가 미국에 송금한 액수는 전체 수입의 55%인 3백56억9백27만원이었다. 실제 수입이 한 작품당 3억7천4백83만원 정도 되는 셈이다.

만약 UIP가 미국에 편안히 앉아 95편을 한국의 외화 수입업자에게 팔았다면 얼마를 벌었을까. 더 벌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영화인들의 설명이다. 그만큼 한국은 외화를 비싸게 수입해 온다. 그리고 앞으로 수입가가 지금보다 더 높아지면 높아졌지 낮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영화인들은 UIP가 한국을 떠난다는 소문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수입 외화 가격이 이렇게 천정부지로 치솟았는가. 외화 수입업자들끼리의 과열 경쟁이 그 첫째 이유로 꼽힌다. 85년 영화사 설립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고, 87년에 외화 수입이 자유화하면서 외화 수입업자들이 ‘제 살 파먹기’ 경쟁을 시작한 것이다. 흥행이 될 영화를 선점하기 위해 턱없이 높은 값을 제시하고, 남이 예약한 작품을 돈을 더 얹어주고 가로채고, 또 자기가 사지 못한 작품을 남도 사지 못하게 훼방을 놓았던 것이다. 외국 배급업자들은 한국 수입업자들의 그같은 약점을 이용해 영화 값을 높였고, 결국 한국의 외화 수입업자들은 ‘봉’이 되고 말았다. 홍콩 영화 수입 과정을 훑어보면 과열 경쟁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연걸의 <황비홍>이 들어오기 전만 해도 웬만한 홍콩 영화의 수입 가격은 20만~30만달러였다. 하지만 <황비홍>이 흥행에 성공한 이후 한국 수입업자들이 인기 배우가 출연한 홍콩 영화 수입에 열을 올리면서 값이 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최근에 와서는 이연걸·성룡 같은 배우가 출연한 영화는 최소한 백만달러 이상을 주지 않으면 들여올 수 없게 되었다. <취권 2>(1백30만달러), <황비홍·철계투오공> (1백40만달러), <성룡의 홍번구>(2백만달러), <도신>(1백50만달러), <화평본위>(1백40만달러) <성룡의 선더볼트>(2백20만달러)가 그같은 경우다. 덩달아 다른 영화 값도 뛰어 대부분 50만달러를 웃돈다.
“흥행 실패해도 비디오 판권 팔면 된다” 배짱

할리우드 영화 수입도 비슷하다. 직배사가 직접 배급하면서 영화 선택의 폭이 좁아지자 영화사들은 ‘생사’를 건 경쟁을 벌였다. 외국에서 큰 영화 시장이 열리면 그곳으로 가는 비행기는 전세를 낸 듯 영화업자들로 바글거렸고, 현지에서는 엎치락뒤치락 가격 경쟁이 벌어졌다. 지난 3월 미국 샌타모니카에서 열린 미국 영화 견본시장에도 한국 영화사 관계자 백여 명이 몰려가 서로 경쟁했다. 미국 영화사들은 한국 영화사들의 경쟁을 부추겨 값을 높이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사 돌꽃컴퍼니 김영재 이사는 “한국 영화사들은 너도나도 유명 감독·배우가 나오는 영화만 찾는다. 미국 업자들은 그것을 빌미로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한국 영화사들의 지나친 경쟁이 부른 손해를 지적한다.

외화 수입업자들이 자신들이 과열 경쟁을 하고 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영화제작협동조합 같은 모임에서 과열 경쟁을 피하자고 입을 모은 적도 있다. 하지만 상품 앞에만 서면 약속은 깨지고 만다. 영화를 지나치게 이윤 상품으로 보고 덤비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할리우드 영화 역시 수입가가 백만달러 이상 되는 경우가 흔하다. 지난해와 올해 초 들여온 <겟어웨이>(1백20만 달러), <툼스톤>(1백70만달러), <아이 러브 트러블>(1백75만달러), <컬러 오브 나이트>(2백20만달러), <스타게이트>(3백50만달러), <덤 앤 더머>(1백20만달러), <라파누이>(1백50만달러), <허드서커 대리인>(백만달러), <넬>(1백30만달러) 등이 그것들이다. 최근 수입 여부를 놓고 논란을 빚은 <쇼걸>은 3백만달러 선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전에는 단지 뤽 베송이 감독하고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다는 이유만으로 아직 시나리오도 나오지 않은 영화를 4백90만달러에 입도선매한 일까지 생겼다. 한국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서편제> <투캅스> <그 섬에 가고 싶다>가 각각 37만5천달러, 22만5천달러, 4만달러, 10만달러에 팔린 것과 비교하면 우리가 외화를 얼마나 비싸게 사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사들이 흥행 성공이 불투명한 외화를 이렇게 비싸게 사오는 것은 도깨비 방망이 같은 비디오 판권 때문이다. 즉,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유명 감독이 만들고 배우가 출연한 영화라면 비디오 판권을 비싸게 넘겨 어느 정도 본전치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음 놓고 과열 경쟁을 벌일 수 있도록 하는 든든한 ‘자금줄’인 셈이다. 하지만 그 자금은 우리 국민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결국 비싼 외화 수입은 ‘제 살 파먹기’나 다름없다.

UIP 철수설은 그냥 소문으로 끝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의 외화 수입업자들이 계속해서 봉 노릇을 한다면 그 설은 빠른 시일 안에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제 한국의 외화 수입업자들은 각성해야 한다. 그래야 사상누각인 영화산업을 안전지대로 옮길 수 있다. 영화사 백두대간 대표 이광모씨의 다음과 같은 지적대로라면 그 일은 오로지 외화 수입업자들의 손에 달린 것처럼 보인다. “일본 영화사들은 자기들끼리 적정 가격을 정하고 협상한다. 그리고 일단 한 영화사가 계약을 맺으면 건드리지 않는다. 우리도 가능하다면 말로라도 담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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