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비평] 밀실 속 ‘독학 성교육’
  • 이성욱 (<문화과학> 편집위원) ()
  • 승인 1995.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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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에게는 성문제에 대한 교육·토론의 객관화 장치가 봉쇄되어 왔다. 신세대가 성문제에 대한 이중성의 간격을 좁혀 놓는 동시에 ‘사회적’ 토론의 활성화를 불러낸 점에 대해 고마워해야 할는지 모른다.
전통적인 생활 양식과 세계관에 길든 기성세대에게는 무척 곤혹스러운, 그러나 거부하거나 거스를 수 없는 현상이 이른바 여성 문제와 신세대의 등장이다. 그런데 이 두 영역의 부각이 1차적으로는 성 차이의 윤리와 세대 갈등 문제에 대한 정당한 이해와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것만이 아니라 그 영역에 복층적으로 횡단하고 있는 문제가 동시에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가령 성문제에 관련된 것이 그렇다.

기존 사회 질서의 재생산을 우선하는 기성세대가 새롭게 자라나는 세대를 그 질서 안에서 자신과 똑같은 모양으로 길러내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들은 또한 기성세대들의 그런 복제 욕망에 저항하고 일탈한다. 여기서 긴장이 발생한다. 몇해 전 신세대의 등장이 몰고온 파장 가운데 강도 높은 것은 기실 성문제였다. 각종 대중 매체는 물론이고 소설을 비롯한 예술 장르에서 성문제에 대한 신세대들의 과감하고도 직정적인 발언은, 어정쩡한 성 담론에 끌려 다니면서 그런 수준의 성 담론으로 새로운 세대에게 ‘성교육’을 하려던 기성세대들을 심히 당황·긴장하게 만들었다. 이에 기성세대는 방종이니 무책임이니 하는, 너무 오래, 자주 써 먹어 이제는 누더기가 되어 버린 논리로 반격을 꾀했지만, 신세대는 그런 반격 뒤에 웅크리고 있는 성문제에 대한 기성세대들의 철저한 이중성을 비웃기만 했다.

밀실 속 ‘독학 성교육’이 성 의식 왜곡

일전에 출간된, 독일 청소년 교육용 수준밖에 안되는 <섹스북>이라는 책 내용조차 감당하지 못해 화들짝 반응을 보이는 우리 기성세대의 태도도 비슷한 맥락에 놓여 있다. 어떤 보도대로 한 대학 관계자들이 자기 학교 학생이 그 책 광고에 나가 섹스니 동성애니 하는 ‘망측한’ 언사를 뱉었다고 제적 운운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웃지 못할 기성세대의 무지스러운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성문제에 관한 한 기성세대는 신세대를 가르칠 수가 없다. 컴퓨터에 대해 기성세대가 신세대에게 허둥지둥 배워야 하듯이, 성문제에 대해서도 신세대에게 오히려 ‘재교육’ 받아야 할 처지이다. 진보적이라 자부하는 30~40대들도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 역시 성문제에 대한 분열과 고착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한쪽으로는 “둘은 끝까지 순결했습니다”(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신성일과 엄앵란이 동반 자살한 후 두 시신을 검시하고 나온 검시관의 말)가 강요하는 ‘순결 이데올로기’, 그러나 현실에서는 남녀 모두에게 똑같이 왜곡된 성적 폭력을 행사하는 문제의 그 순결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상과, 다른 한쪽으로는 “친구집에 갔는데 친구 누나가 혼자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등의 극장 화장실 낙서, 혹은 <선데이 ○○>이나 <○○과 실화> 류가 제공하는 ‘거대 남근 콤플렉스’ 아니면 ‘지칠 줄 모르는 피스톤 신화’ 사이에서 성문제를 육화시켜 왔고 또 그 사이에서 우왕좌왕해 왔던 것이 대부분일 터이다.

뿐만 아니라 각종 대중 매체에서 주어지는 성적 이미지를 착실히 수용하는 일은 현실에서 자신의 성을 왜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대중 매체에서의 그 이미지화는 현실이 아니다. 이미지와 실제 사이의 간격이 너무 넓은, 섹스의 상품미학적 장식과 다름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과잉 성 현실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기성세대는 현실에서 자신의 성을 실제가 아닌 예의 이미지에 끊임없이 비교·조회해 보고 성에 관한 한 자신이 과소 인간임을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처방은? 대개 두 가지였다. 성의 과소함을 벗어나기 위한 맹목적 섹스 중독, 그리고 변강쇠 정력을 위한 만 가지 비약과 최음 기술에의 갈망이었다.

대중 매체를 통한 성의 이미지화 및 그에 따른 호도는 신세대 문화에서도 여전하다. 그러나 기성세대의 그것과는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기성세대에게는 성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론과 교육·토론의 객관화 장치가 봉쇄되어 왔다. 독학만이 있었다. 하지만 신세대 문화에서는 적어도 성문제의 왜곡과 폭력적 사용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를 설비하려는 고민이 병존한다. 이 차이는 종국에 대단히 큰 결과를 초래한다.

신세대의 활약이 기성세대에게 마뜩찮게 여겨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성문제를 자의적인 밀실이 아니라 공론의 광장에 끌어낸 것과, 이를 통해 성문제에 대한 사회의 지나친 이중성의 간격을 좁혀놓는 동시에 사회적 토론의 활성화를 불러낸 점에 대해서는 고마워해야 할는지 모른다. 기성세대 자신의 모순적 성 이해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재교육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 때문에 그런 것이다. 기성세대에게 성문제에 대한 사회적 재교육은 보통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기성세대 각자에게 성문제의 ‘리엔지니어링’사고가 요청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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