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와 ‘웰빙 몽상’
  • 이재현(문학 평론가) ()
  • 승인 2004.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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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이 철수하고, 평화협정이 맺어지며 군축이 이루어지고 통일이 된다. 징병제가 모병제로 바뀌고, 병사들은 합당한 월급을 받게 된다. 아, 내 몽상은 끝없이 계속된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정렬 판사의 판결을 환영한다. 주한미군 감축이라는 사태와 맞물려 모든 국민에게 ‘웰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불어닥친 웰빙 붐은 돈과 시간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했고 결국 업체들만 좋았던 게 사실이다.

웰빙 얘기가 나온 김에 내가 하는 몽상 한 가지 소개해 보고자 한다. 웰빙으로서의 몽상은 돈이 안드는 데다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번 판결이 지향하는 이념은 대체복무제를 넘어서 주한미군의 완전한 철수에 의해서 실현된다. 이번 판결에 대해 군대 갔다 온 사람이나 군대 갈 사람들이 갖는 불만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누구든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기만 하면 된다.

군대에 가기 싫은 사람은 굳이 종교적 이유에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기 양심이 시키는 바에 따라서 병역을 거부할 수 있게 된다. 뭐, 양심이라는 게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기계가 되기는 싫다는 것, 같은 동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눌 수는 없다는 것, 한창 젊은 나이에 인생을 군대에서 썩힐 수는 없다는 것,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것, 여자 친구와 헤어지기 싫다는 것-이 모든 게 양심적인 병역 거부의 이유가 된다.

보수 언론이 앞장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물론, 모든 남자가 병역을 거부하게 되면, 보수 언론이 떠드는 바 안보상의 불안이 야기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에 책임이 있는 한 축인 주한미군을 하루라도 빨리 이 땅에서 완전히 내보내자는 국민적 합의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현재 한반도의 정치적·군사적 지형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된 실질적 논의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북한 핵 문제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든지 북한의 핵은 용납되지 않는다. 반면에 핵 문제를 포함해서 북한에 대한 공정한 비판과 토론을 남한에서 가로막고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국가보안법이다.

따라서 내 몽상 속의 ‘보수 언론’들은 북한을 계속 비판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폐지와 주한미군 철수를 강력하게 외친다. 친북 세력과 공정하게 토론하려 함이다. 보수 언론은 친북 세력의 정치 노선을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강력하게 친북 세력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자유스럽고 안전하며 공공연하게 표출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적 야간 촛불 집회를 불허하겠다는 경찰청 발표에 대해 보수 언론은 연일 강렬하게 질타한다. 국가보안법이야말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공공의 적이라는 보수 언론의 캠페인은 마침내 성공을 거둔다. 국가보안법은 여야 합의로 쉽게 폐기된다.

곧이어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평화협정이 맺어지며 군축이 이루어지고 통일이 된다. 국방비가 남으니까 이 엄청난 돈은 다른 데 쓰이게 된다. 징병제가 모병제로 바뀌고, 병사들은 합당한 월급을 받게 된다. 이제 군대 체질인 사람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자아를 실현하게 된다. 여군의 비율도 50%로 법제화하고 실업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된다. 병사는 변호사·의사와 같은 ‘사’자 돌림의 인기 신랑감이 된다. EBS는 군 입대 시험 방송을 하느라 바쁘고, 나는 문학 과목의 인기 강사로 떠오른다.

아, 내 몽상은 끝없이 계속된다. 이제 병무청의 관심사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병무청은 주한미군 철수 전까지는, 다시 말해 평화협정→군축→통일→모병제로 나아가기 전까지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 해고를 마구잡이로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며 결사 항전의 자세로 나선다. 그래야 무한정 늘어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바꾸기 위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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