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에 실려간 그들의 청춘
  • 서명숙 (<시사저널> 편집위원) ()
  • 승인 2004.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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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공부도, 다니던 직장도, 사귀던 연인도 다 접은 채 군에 징발된 청춘들은 ‘가혹하고 열악한 환경’에 시달린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해야 한다면, 징발에 순응한 이들의 불만과 불이
‘일하는 엄마’여서 가정 교육에 소홀했던 탓일까.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 큰아들래미는 자라나면서 어지간히 속을 썩였다. ‘자식이 웬수’라는 어른들의 말이 뼛속에 사무칠 만큼.

그 애가 아장아장 걸을 때만 해도 ‘저렇게 귀여운 놈을 어찌 군대에 보낸단 말인가’ 싶어 아이가 크기 전에 군대가 폐지되거나 모병제로 전환되기를 소망했다. 허나 몇년 전부터는 ‘군대에서 빡빡 기어봐야 저놈이 정신을 차리지’ 하는 마음에 군대 보낼 날만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친척 조카가 제대한 지 5년이 넘었건만 가끔 군대에 재입대하는 악몽을 꾼다, 그럴 때마다 러닝셔츠가 축축해질 정도로 식은땀을 흘린다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새삼 깨달았다. 조직의 ‘쓴맛’을 보면서 아들이 철 들기를 바란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국민된 도리와 의무로 보낼망정 입대 날짜를 손꼽아 기다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어버이들의 최대 관심사이자 청년들의 최대 현안인 군 입대 문제를 놓고 온 나라가 시끄럽다. 수십 년 익숙해진 이 문제가 새삼 화두로 등장한 것은 최근 서울남부지법이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무죄 판결이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나라가 흔들리느니 마느니, 각종 매체와 인터넷 홈페이지마다 논쟁이 뜨겁다. 현역보다 예비역들이 더 격하게 울분을 토하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법원의 판결에는 큰 무리가 없다고 여긴다.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의 기본 정신이나, ‘심오한 신념에 기초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라’는 유엔 인권위원회의 결의 46조에 비추어 판사는 충분히 그런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소수의 처지와 사상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회가 진화한 사회 아닌가.

문제는 다수가 처한 현실이다. 군대를 갔다왔거나, 현재 복무중이거나, 앞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 대다수 대한민국 남자들의 운명이다. 그 운명은, 하필이면 인생의 황금기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다가온다. 하던 공부도, 다니던 직장도, 사귀던 연인도 다 접은 채 그들은 군에 징발된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체 생활이다. 제아무리 선진 군대도, 개선된 내무반도 나고 자란 가정만 못할 것은 뻔한 일. 그 와중에 단체 기합과 구타, 집단 사역이 끝없이 이어진다. 군대 내 의문사가 잇따르면서 내무반 문화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머리 굵은 장정들을 모아놓은 조직을 통솔하는 기본은 통제일 수밖에 없다. 자유분방한 피끓는 청년기에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요즘 신세대에게는 더 말해 무엇하랴.
처우는 또 어떤가. 부식도 나아졌고 인터넷도 가능하다지만, 한창 나이의 사병들이 한달 ‘쌔빠지게 구른’ 대가로 받는 돈은 겨우 2만원 안팎. 개구리가 하품할 액수다.

제대 후에는 더 열받을 일이 기다린다. 같은 나이의 여자들-물론 취업 못한 여자들이 더 많지만-이나 병역을 면제받은 친구들은 일찌감치 입사해서 선배가 되어 있고, 그나마 위안 삼던 군 가산점 제도도 위헌 판결로 폐지되고 말았다.

위헌 여부를 따지자면, 그 좋은 나이에 하던 일 다 중단시키고 강제로 데려가서 쥐꼬리도 못되는 월급을 쥐어주는 군 입대 제도야말로 개인의 행복 추구권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위헌 소지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열을 올리는 이들도 있다. 나름으로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네티즌 상당수가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 제도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도 어떤 이유에서든 병역 면제는 또 다른 특혜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을 만큼 군 현실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소수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해야 한다면, 다수의 불만과 불이익은 국가 행정이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푸르른 청춘을 군복에 실어 보내려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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