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식 현대상선 사장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1.10.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문경영인은 '파리 목숨'/
부실 계열사 지원 압력에 반발하다 '사임'
한국에서 '전문경영인 시대'는 아직도 먼 나라 이야기인가. 지난 10월4일 현대상선 김충식 사장(사진)이 전격 사임하면서 재벌 오너 체제에서 전문경영인의 한계가 또다시 거론되고 있다.


1972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1976년 현대상선으로 옮긴 뒤로 25년간 고락을 함께해 온 김씨는 회사를 자기 손바닥처럼 훤히 꿰뚫고 있는 '상선통'. 재무·회계·관리·기획·영업 등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경험하지 않은 분야가 없다. 특히 이번 사임은 지난 6월 현대상선이 금강산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 뒤 세계적인 해운업체로 재도약하려는 시기와 맞물려서 사원들은 더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한 직원은 "사장님이 그만두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사원들의 정서다"라며 아쉬워했다.




사표를 낸 김씨에 따르면, 지배 주주인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의 입김이 강한 현대그룹에서 전문경영인으로서 역량을 펼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규모와 위상 면에서 현대그룹의 맏형이 현대상선인 만큼 그는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라는 압력에 시달렸다.


올해 초 본사와 무교동 사옥을 팔고 계동 사옥에 입주하는 식으로 자금을 마련해 계열사를 도우라는 요구를 받은 것이 대표적인 예. 게다가 정몽헌 의장의 측근인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과 현대아산 김윤규 사장과의 갈등도 극심했다. 지난해 말 김재수 본부장이 상선이 갖고 있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 반도체) 지분을 팔아 유동성 위기에 빠진 현대건설을 돕겠다는 방안을 일방적으로 내놓자 그는 주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며 반발했다. 김윤규 사장과는 금강산 사업 지원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현대의 한 관계자는 김충식 사장의 사임이 현대상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가르는 전환점이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독자 경영 체제를 갖춘 회사에서 앞으로는 그룹을 이끄는 지주 회사 성격이 강조되리라는 것이다. 이럴 경우 부실 계열사 지원은 피하기 어렵다. 주 채권 은행인 산업은행이 김사장 퇴진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현대측이 '그룹사에 대한 그 어떤 지원도 없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이미 임시 경영진에는 정몽헌 의장의 측근인 현대엘리베이터 최용호 부사장이 자금을 포함한 관리지원 담당 총괄로 취임했다.


현대측이 공식 발표한 김씨의 사임 이유는 '건강이 나빠서'이다. 하지만 그는 몸이 아파서라기보다 마음의 상처가 심해 회사를 떠난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