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돌풍' 몰고온 백윤식의 카리스마 탐구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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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백윤식씨, 카리스마 속에 숨은 코믹 연기로 상종가 행진
가뜩이나 바쁜 방송 녹화 날, 스튜디오와 분장실을 분주히 오가는 백윤식씨(57) 앞에 머리 짧은 남자 고등학생 하나가 쭈뼛쭈뼛 다가선다. “선생님 사진 좀….” 고등학교 방송반 학생들이란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약속도 없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눈들을 외면할 수 없다. ‘찰칵!’ 친구들에게 보여줄 자랑거리를 챙긴 학생들이 우루루 분장실을 빠져나간다.

지난 9월8일 서울방송 시트콤 <압구정 종갓집> 촬영이 진행되는 탄현 스튜디오. 종가의 장남 역을 맡고 있는 백윤식씨는 이 날 촬영 내내 “대한민국 장남은 고부 갈등을 풀어야 할 책무가 있다”라는 대사를 읊고 있다. 말쑥한 양복 차림에 진지한 표정. 실없는 말이라고는 단 한 톨도 없는데, 듣고 있으면 웃음이 번진다.

중견 남성 배우의 새로운 연기 영역 개척

드라마뿐 아니다. 광고에서도 백윤식씨는 상종가다. 종전 같으면 도무지 중년 남성의 영역이라고 할 수 없는 데까지 보폭을 넓히고 있다. “이봐, 나하고 조인성하고 누가 더 잘생겼다고 생각하나? 사실 우리 땐 그런 얼굴은 얼굴로도 안쳐줬지. 그게 얼굴이야?”라던 그는 팩을 해주는 아내에게 투덜거린다. “이거 이러다 조인성이처럼 되면 어쩌려고 그래?(태평양 미래파 화장품 )” 천연덕스러운 백윤식씨의 이미지를 활용한 이 광고는, 에피소드가 인상적인 나머지 정작 제품명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빚어질 정도로 히트했다.

정녕 누가 더 빼어난 미남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조인성보다 바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미스터 김의 뮤직 비디오 <담백하라>와 가수 혜은이의 <파란 나라>를 록·발라드·랩 세 가지 버전으로 불러제끼는 포털 사이트 파란닷컴의 이미지 광고 또한 캐스팅의 의외성으로 홈런을 날렸다. 그가 ‘새로 발견된 중견 배우’와 다른 점은, 드라마와 영화와 광고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지속적으로 파장을 넓혀가며 상승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만큼 젊은 세대와의 접점도 넓다.

배우 백윤식씨가 대중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MBC 드라마 <서울의 달> 때부터이다. 이전까지 희고 선이 굵은 그의 얼굴은, 이중섭이나 나운규 등 뭔가 범상치 않은 인물을 연기하는 데 맞춤이었다. 작가 김운경씨는 <서울의 달>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엉뚱한 말을 하는 미술 선생 역을 통해 그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케 했고, KBS <파랑새는 있다>에서 그 이미지를 다시 한번 활용했다. 하지만 여파가 너무 길었다. 좀체 다른 색깔의 제안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돌파구는 영화 쪽에서 마련되었다. 2003년 개봉한 <지구를 지켜라>(연출 장준환)가 자신에게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고 말한다. 혼신의 힘을 다했던 만큼, 처음에는 속도 많이 상했다. “다들 좋다는데 왜 흥행이 안되나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장감독은 이후 외국에 상 타러 다니느라 바빴고, 나도 그 해 영화제 조연상을 휩쓸어 연기계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참, 부천국제영화제에서는 남우주연상까지 받았네.”

영화 출연을 결정할 때, 이 정도 파장을 예상했을까. “이 나이쯤 되면 ‘책(시나리오)’을 보면 느낌이 팍 오지.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내가 이 나이에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었지. 머리 빡빡 밀고, 분홍색 프릴 달린 여자애 속옷 입고 그래야 하니까. 그런데 배우로서의 나는 ‘욕심 나잖아?’ 이렇게 속삭여. 하루는 ‘하자’, 그 다음날은 ‘말자’ 이랬다구. 마침 막 연기에 발을 디딘 내 아들은 열심히 권하더군.”

그가 <지구를 지켜라>에 출연하기로 마음을 굳힌 데는, 제작자·프로듀서·감독에 대한 신뢰도 많이 작용했다. 시나리오를 우편으로 부치지 않고 영화사 대표가 직접 찾아왔던 것이다. ‘영화 내용이 이렇게까지 부탁해야 하는 정도인가’ 싶어 부담이 컸지만, 간곡하게 자신의 출연을 청하는데 마다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내쳐진 걸음. 남들은 한 정신병자에게 납치되어 치도곤을 당하는 ‘강사장’ 역을 놓고 망가지는 역이다 뭐다 하지만, 백씨에게는 연기의 모든 진폭을 한꺼번에 보여주어야 하는 난이도 높은 연기라는 것만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 긴장했고 몰입했다. “촬영할 때 스태프가 나를 흘끔거리며 웃음을 감추느라 애쓰는데도 정작 나는 몰랐어. 나중에서야 내 모습이 온전히 보이더라고. 그제서야 왜 쿡쿡거리며 고개를 돌려댔는지 알았지.”
앞으로 그의 영화쪽 행보는 더욱 빨라질 듯하다. <지구를 지켜라>는 곧 <범죄의 재구성> 출연으로 이어졌고, 다음 작품도 곧 촬영이 시작된다. 10·26을 다룬 임상수 감독의 작품 <그 때 그 사람들>에 ‘매우 중요한’ 배역으로 캐스팅된 것이다. 여러 가지 변주를 거듭했어도 주조는 코믹함을 벗어나지 않았던 그가 이번에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궁금한데, 영화사는 입단속하느라 좀체 힌트를 주지 않는다.

1970년 KBS 공채 탤런트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으니 벌써 연기 생활 35년째. 그는 최근 새로 발견된 중견 배우들의 틈바구니에서도 젊은 세대가 가장 친근하게 느끼는 배우의 자리를 점했다. 물론 아직 몸까지 가까운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자신의 광고 이미지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점이 이채롭다. 광고는 배우에게 그냥 ‘보너스’ 같은 것이란다. “딱히 고른다기보다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광고가 들어오는 것 같다”라며 입을 닫아버린다. “내 블로그가 있는데 자주 못가. 바쁘기도 하고, 뭐 젊은 사람들 반응이야 그렇지, 뭐.” 그는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뜨겁게 구애하고 있는지 정녕 모르는 걸까. 알고도 시치미를 떼는 걸까. 진지한 그의 표정으로는 속을 알아챌 수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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