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해적의 밋밋한 모험
  • 김봉석(영화평론가) ()
  • 승인 200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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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이야기는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개인적인 추억을 떠올리자면, 책으로는 누구나처럼 <보물섬>이었고, 영화로는 <신밧드의 모험>이었다. 물론 신밧드가 해적은 아니었지만, 배를 타고 대양을 누비면서 펼치는 모험이라는 점에서 다를 것이 없었다. 해적 이야기의 핵심은 그 직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호쾌한 모험에 있다.

<캐러비안의 해적>에 관심이 쏠린 것도 그런 이유다. 게다가 예고편에서는 해적들이 ‘살아있는 시체’임을 드러내며, 환상적인 판타지가 어우러진 해적의 모험담임을 알려주었다. 그것이야말로 도시의 팍팍한 일상에 지친 남자들을 위로해 줄 영화 아닌가. 하지만 <캐러비안의 해적>의 첫걸음은 조금 묘하다. 바람을 맞으며 멀리 바다 저편을 바라보는 해적 잭 스패로(조니 뎁). 그런데 카메라가 잭의 아래를 비추자, 거대한 해적선이 아니라 조그만 나룻배가 잡힌다. 잭은 부하였던 바르보사(제프리 러시)에게 배신당해 배와 모든 것을 빼앗긴 신세다. 새로운 배를 얻겠다는 야심은 충만하지만, 실제로는 대장장이인 윌 터너(올랜도 블룸)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쇠락한 해적이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지만 ‘액센트’ 없어

<마우스 헌트> <멕시코> <링>을 만든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솜씨좋게 다듬어낸 장인이다. 아직 확고한 자신의 스타일은 없지만, 어떤 영화건 수작으로 만들어낸다. <캐러비안의 해적>처럼 다양한 장르가 뒤얽힌 영화를 만드는 데는 적격이다.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배들의 전투나 영국 전함 위에서 벌어지는 해적과 영국군의 혈투 같은 스펙터클한 장면에서도, 잭과 윌의 기묘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유머와 소동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지는 장면에서도, 고어 버빈스키의 연출은 중심을 잡고 있다. 특별하게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다.

하지만 <캐러비안의 해적>의 약점은 바로 그것이다. 강하게 끌어당기는 무엇이 없다는 점. 사실 해적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일은 수월하지가 않다. 레니 할린의 <컷스로트 아일랜드>가 증명했듯이 바다 위의 액션은 한 장면으로는 재미있지만 이야기를 끌고가기에는 너무 심심하다. 역시 좋은 것은 뭔가 새로운 모험이 자꾸만 닥치는 상황이다. 율리시즈나 아르고호의 대모험 같은 이야기를 해적판으로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고전적인 악당이 등장하는 해적 이야기는 너무 지루하다. 기본 골격에 뭔가 판타지를 넣어야 한다. <캐러비안의 해적>은 아즈텍의 보물을 훔친 해적들이 월광 아래에서 해골로 보이는 멋진 장면들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바다 속을 줄지어 걸어가는 해골의 풍경 같은 것들. 하지만 그것뿐이다.

다행히도 조니 뎁의 연기가 <캐러비안의 해적>을 다소 구원해준다. 몽상가 역을 주로 맡아왔던 조니 뎁은 덜떨어진 해적 잭 스패로 역을 활기차게 연기한다. 거짓말을 일삼고 때로는 비열하기도 하고, 가끔 배신도 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해적 잭 스패로를 보는 일은 아주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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