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여 분노하라!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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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체성 문제 파고든 연극 <자기만의 방> <사랑을 선택하는…>



"내인생에서 최대 과오는 분노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거야.”(<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분노할 수 있다는 건 권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지.”(<자기만의 방>)


늦가을 연극가에 ‘분노의 충돌’이 일어났다. 버지니아 울프의 원작을 한국 실정에 맞게 류숙렬씨(<이프> 편집위원)가 각색한 <자기만의 방>(김영란 연출, 10월28일∼11월3일 인켈아트홀)과 지난해 출간된 김형경씨의 동명 소설을 전옥란씨(방송 작가)가 각색한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임영웅 연출, 10월29일∼12월29일 산울림소극장). 두 작품은 ‘분노’를 공통 촉매로 삼아 여성의 정체성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단 두 작품이 분노를 다루는 방식은 대조적이다. <자기만의 방>의 분노가 외부를 향한다면 <사랑을 선택하는…>의 분노는 내면을 향한다.


10년 전 초연 때 5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페미니즘 연극 열풍을 주도했던 작품답게, <자기만의 방>은 일단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를 향해 분노의 직격탄을 날린다. 마손톱(마광수)·김동양(김용옥)·김생명(김지하) 등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여성관을 유포해 온 것으로 의심되는 지식인 남성들이 첫 공격 대상이다.

2002년 버전에서는 영화를 통해 ‘강간 신화’ ‘창녀 신화’ 따위를 유포한 혐의로 장선우·김기덕·이창동 감독이 추가되었다. 연출 겸 주연으로 이 모노 드라마를 끌고 가는 김영란씨는 “여자가 자기를 강간하려던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강간도 예술적으로 하면 국제적인 상을 받는 모양이죠?”라며 최근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오아시스>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꼬집는다.


아쉬움 남긴 낡은 분노와 설익은 분노


이에 반해 <사랑을 선택하는…>은 자기 안에 분노의 정서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사는 여성들의 귀에 ‘네 안의 분노를 직시하라’는 주문을 속삭인다. 재치있고 스마트하며 자의식이 강한 듯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성(性) 불능’ ‘사랑 불능’에 시달리는 주인공 세진(이항나)은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착한 여자’들의 자화상이다. 자신의 무의식을 한사코 억압하려 드는 세진과 그녀 안에 잠재되어 있는 분노를 끄집어내 폭발시킴으로써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신경정신과 의사 박문규(박용수). 두 사람이 벌이는 팽팽한 신경전이 작품의 백미이다.


문제는, 관객들에게 분노 표출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안겨 주기에는 두 작품 모두 다소 미흡하다는 사실이다. <자기만의 방> 각색을 맡은 류숙렬씨는 “옛 작품을 거의 손대지 않은 채 무대에 올림으로써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에서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가늠해 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딴은 그렇다. 지난 10년간 여성부가 출범하고 성폭력, 모성 보호 따위 온갖 여성 관련 법안이 제정되었지만 여성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실에 분노하는 것과 그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별개 문제이다. 지난 10년간 급변한 관객들의 의식을 따라잡기에는 <자기만의 방>의 정서가 ‘낡은 분노’로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사랑을 선택하는…>의 분노는 설익었다. 관객이 세진에게 충분한 ‘전이’를 느끼기도 전에 연극은 서둘러 갈등을 봉합하고 만다. 이것이 원고지 2천6백장짜리 소설을 2시간짜리 연극으로 압축한 데 따른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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