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거치면 나도 스타”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2.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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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연기자 ‘발굴’에 주력…배우들 기본기 탄탄해져 뮤지컬 제2 전성기 예고



"안해봐서 못하는 겁니다. 가르쳐 주시면 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가르쳐 줄테니까 한 번 해보세요.” “탭 댄스는 전혀 안 해봤습니다.” “그럼 해보려고 한 것은 뭡니까?”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저희도 죄송한데요, 그만 나가 주시겠어요?”



쩔쩔매는 응시자, 그리고 이들을 매섭게 노려보는 심사위원. 뮤지컬 <더 플레이> 오디션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초대형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성공해 주연 배우 류정한과 김소현이 대형 스타로 떠오르면서 뮤지컬은 이제 브라운관·스크린과 더불어 스타 탄생 ‘제3의 길’로 각광받고 있다.



2002년 뮤지컬 대상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5개 부문에서 수상하며 스테디 셀러로 자리잡은 <더 플레이>는 스타 지망생들이 탐내는 작품이다. 남녀 주인공만 주목되는 다른 뮤지컬과 달리 모든 출연진이 1인 다역을 맡은 만큼 기량만 있으면 누구든지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연급 탤런트였던 유준상씨는 <더 플레이>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인 뒤에 주연으로 입지를 굳혔고 탤런트 노현희씨도 만능 연예인으로 주목되게 되었다. 이번 오디션에도 스타 지망생 100여 명이 응시했는데 탤런트 이하얀씨 등 기성 탤런트·가수도 여럿 참가했다. 방송국 공채 탤런트 출신인 유서진씨(25)는 “소속 기획사의 힘으로 스타가 되는 방송보다 자신의 능력으로 스타가 되는 뮤지컬이 훨씬 매력 있어서 응시했다”라고 말했다.



오디션은 좋은 뮤지컬의 시작이다. 1천5백회를 넘게 공연한 지하철 1호선의 저력은 바로 엄격한 오디션을 통해 뛰어난 배우들을 재충전한 데서 나왔다. <더 플레이> 오디션에는 이미 출연했던 배우도 참가했는데, 누구든지 오디션을 거쳐야 출연할 수 있다는 극단의 원칙 때문이었다. 심지어 출산 예정일을 10여일 앞둔 배우 김명희씨(36)까지도 만삭의 몸을 이끌고 오디션에 참가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오디션 문화는 주먹구구식이었다. 주연 배우는 이미 내정되어 있어 단역만 뽑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응시료로 극단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응시자 중에는 악보도 못 읽는 얼치기가 즐비했다.



그러나 <더 플레이> 오디션장은 우리의 오디션 문화가 이제 정착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주었다. 심사위원들은 응시자들을 직접 지도하고 거들면서 오디션을 진행했는데 배우의 기량을 하나라도 더 끌어내려고 애썼다. 이런 오디션 문화의 변화는 <오페라의 유령>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은 좋은 전범이 되었다. 5백명이 넘는 응시자를 한 달 동안 아홉 차례 오디션으로 선발했던 제작진은 적합한 배우를 찾기 위해 뉴욕에서 현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열기도 했다. 오디션을 통해 신인들이 가수 이문세씨와 유 열씨, 뮤지컬 스타 남경주씨 등 쟁쟁한 스타들을 제치고 주연을 꿰어차는 것을 보면서 뮤지컬 배우 지망생들은 희망을 품게 되었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오디션을 거쳐 더블 캐스팅으로 유령 역을 따냈던 <더 플레이> 연출가 김장섭씨는 이때의 경험을 이번 오디션에 응용했다. 여기에 그는 한 가지 장치를 더했다. 브로드웨이 스태프가 심사를 전담했기 때문에 관객의 감수성과 거리가 있었던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의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 그는 마니아 관객 한 명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했다. 회사원 임수산씨(28)가 그 주인공이었다. 임씨는 무대에서 다시 보고 싶은 배우를 뽑기 위해 3일 간의 휴가를 내고 심사에 참여했다.



“배우가 아니라 특공대를 뽑는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 치러진 <델라구아다> 오디션 또한 달라진 뮤지컬 문화를 보여주었다. 격렬한 와이어 액션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오디션은 조금 독특하게 진행되었는데 주로 체력 테스트였다. 1차 심사에서 지구력 테스트를 통과한 응시자들은 2차 심사에서는 하네스(암벽 등반용 안전장치)를 착용하고 벽을 타고 달리는 시험을 보았다. 지켜보는 사람까지 조마조마해질 만큼 엄청난 모험심을 요구하는 시험이었다. 한 오디션 응시자는 “배우가 아니라 특공대를 뽑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번 오디션은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공연할 팀을 뽑는 것이었는데 고압적인 여느 오디션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심사를 맡은 수석 배우 클라라 엘리엇과 데이비드 브레이는 한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함께 뛰며 심사를 진행했다. 몸풀기 운동부터 직접 지도한 이들은 응시자들의 안전장치까지 하나하나 살피는 등 세심하게 배려했다.



<델라구아다> 오디션 응시자들은 심사가 혈연·지연·학연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김수진씨(21)는 “오디션장은 보통 오디션장인지 동창회장인지 모를 정도로 출신 학교 후배들에 대한 편애가 심하다. 나 같은 지방 대학 출신은 씁쓸한 소외감만 맛보았다. 이번 오디션에는 위축되지 않고 마음껏 내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최근 오디션장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성은 응시자들의 출신 배경이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가창력이 중시되었던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에 팝페라 디바를 꿈꾸는 성악도들이 응시했던 것처럼 와이어 퍼포먼스인 <델라구아다>에는 무용학도가 많이 응시했다. 이밖에도 스턴트우먼으로 일하고 있는 전규정씨(33), 재즈댄스 강사인 이정민씨(26), 홈쇼핑 채널에서 모델로 일하는 오승희씨(25)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응시자들이 오디션에 참여했다.



기본기를 다진 배우가 많아졌다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극단 활동 짬짬이 기계 체조 등을 이용해 몸을 다져온 덕분에 <델라구아다> 심사를 통과했다는 정태민씨(25)는 “선배 배우들은 연극이 끝나면 함께 어울려 술을 마셨다. 우리 세대는 밥을 먹으면서 체력을 벌충한다. 할 얘기가 있으면 차를 마시며 한다”라고 말했다.



뮤지컬 오디션장의 클라이맥스는 뛰어난 인재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델라구아다> 오디션장에서 한 응시자가 벽타기를 완벽하게 해내자 심사위원은 주저 없이 “챔피언!”을 외치며 기뻐했다. <더 플레이> 오디션장에서도 3일 간의 심사에 지친 심사위원들의 얼굴을 펴준 것은 한 응시자의 뛰어난 재능이었다. 그의 차례가 끝나자 10점 만점인 점수표에 ‘무조건 합격’이라는 메모를 남긴 심사위원장 김장섭씨는 “기본기가 탄탄한 신인이 많다. 이들이 한국 뮤지컬의 제2 전성기를 열 것이다”라고 말하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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