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 없이 버리기’에 대하여
  • 김수이 (문학 평론가) ()
  • 승인 2002.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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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신작 시집 <뿔>/상실의 인생 여정, 소의 삶에 비유
사람이 살아가면서 무수히 겪는 일 중의 하나는 ‘잃어버리는 일’이다. 실제로 삶의 내용물에서 많은 부분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상처와 슬픔으로 채워진다. 어쩌면 살아가는 일이란 잃어버리는 일에 저항하거나 익숙해지는 과정이며, 심지어 제대로 잃어버리는 법을 배우는 수련의 여정인지도 모른다.





잃어버림의 종류도 뼈아픈 상실에서 홀가분한 버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즉 우리는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한용운, <님의 침묵>)를 잃고,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서정주, <국화 옆에서>)을 잃으며, 마침내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김현승, <눈물>)마저 잃어버린다. 그리고 무슨 깨달음처럼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은/얼마나 아름다운가’(이형기,
<낙화>)를 총총히 배워 나간다.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시인들은 상실과 극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 <갈대> <농무> <가난한 사랑 노래> 등의 시를 통해 실존의 아픔과 가난의 애환을 노래해 온 시인 신경림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이번에 낸 시집 <뿔>(창작과비평사 펴냄)에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이의 회한과 상실감을 진솔하게 기록한다.

그의 여덟 번째 시집 <뿔>은 ‘잃어버린 자의 노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삶의 내부에 켜켜이 쌓인 상실을 아우른다. 시집의 첫 장에 실린 시 <떠도는 자의 노래>는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로 시작해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로 끝나면서 시집의 주제를 선명히 제시한다. 삶이란 잃어버리고 그리워하는 일이라는 생각은 배경 음악처럼 시집 전체를 감싸고 있다.


“한번도 나만의 나로 산 적 없어”


신경림은 삶의 지독한 상실의 여정을 ‘사나운 뿔을 갖고도 한번도 쓰’지 않고 모든 것을 희생한 뒤에 죽는 ‘소’의 삶으로 압축한다. 소가 죽은 후 ‘사나운 뿔은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뿔>)이라는 결론은 삶의 최후가 존재의 원천적인 상실로 귀결될 것을 암시한다. 평생을 불사른 혁명의 열정이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집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고 허탈해 하는 신경림에게 이런 결론은 가혹한 묘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노시인은 ‘한번도 나만의 나로 산 일이 없’(<한 오백년 뒤의>)다고 고백하면서 가장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내용물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텅 빈 삶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자기 자신이다. 한 번도 삶의 표면에 드러나지 못한 자신의 진짜 모습이야말로 평생 쓰이지 못한 채 죽은 후에 폐기될 ‘사나운 뿔’인 것이다.


신경림은 이 ‘사나운 뿔’을 제대로 꺼내 쓰고, 다스리며, 다시 미련 없이 버리기를 원한다.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땅거미 속에 묻으면서./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읊조리는 노시인에게 끝까지 집착할 욕망이나 현실의 가치는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삶이란 그토록 많은 것을 잃어버린 끝에 스스로 잃어버릴 줄 아는 법을 터득하는 제로(zero)의 여정인 것일까.


존재는 그렇게 비워지고 덜어져 무(無)를 넘보는 경지에 이르러서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일까. 신경림의 새 시집 <뿔>은 여기에 대해 뚜렷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다만, 그 고달픈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길의 저 먼 한 지점을 살짝 보여줄 뿐이다. 신경림 역시 허위허위 삶의 힘겨운 길을 가고 있는 연약한 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길에는 ‘얻음’이 아니라 ‘버림’으로써 얻는 새로운 경지가 있어 삶의 역설적인 비밀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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