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 돋는 데도 격이 있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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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인연 강조한 아시아 공포 영화 선전…‘마구잡이 살인’ 할리우드는 시들



공포에도 동서양 구분이 있을까. 오는 7월11일 경기도 부천에서 막을 올리는 제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www.pifan.com)는 ‘그렇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제에서는 동양권 네 나라 한국·일본·홍콩·타이의 공포 영화가 나란히 선보인다. <가위>를 만들었던 안병기 감독의 신작 <폰>, <링>으로 유명한 일본 나카타 히데오 감독의 <검은 물밑에서>, 타이 출신 형제 감독 옥사이드 팡·대니 팡의 <디 아이>, 홍콩 신예 감독 나지량의 <이도공간>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오는 8월 말에는 ‘아시아의 공포’를 주제로 한 3국(한국·홍콩·타이) 합작 옴니버스 영화 <쓰리>가 개봉된다. 본격 미스터리 호러물을 표방한 이 영화에는, 제작사의 말마따나 ‘아시아에서 요즘 제일 잘 나간다는 흥행 감독’들이 대거 참여했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으로 잘 알려진 한국의 김지운 감독, <첨밀밀>로 한국에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홍콩의 천커신 감독, <낭낙> <잔다라> 등으로 자국내 역대 흥행 기록을 잇달아 갈아치우고 있는 타이의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이 그들이다.


왜 갑자기 아시아의 공포 영화일까. 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송유진씨는 그 이유를 할리우드 공포 영화의 부진에서 찾는다. 할리우드 공포물은 흡혈귀·좀비 영화나 10대를 겨냥한 슬래셔(난도질) 영화가 대종을 이룬다. 그런데 이것들의 인기가 요즘 시들하다. 올해도 여름 시즌을 겨냥해 <퀸 오브 뱀파이어> 등이 개봉되지만 흡혈귀의 카리스마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이다. 공포 영화의 해묵은 관습을 비틀어 상쾌한 충격을 주었던 <스크림> 시리즈도 이제는 주류 영화의 반열에 합류해 버렸다.


그보다는 오히려 <식스 센스> <디 아더스>처럼 ‘동양적인 심령 영화’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영화들이 선전하고 있는 것이 최근 몇년 간의 추세이다. 과거와 현재, 인간계와 영계가 서로 뒤엉키면서 내면의 공포를 음산하게 자극하는 아시아 취향의 공포물이 관객의 마음을 끌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할리우드는 아시아 본토박이 공포 영화에까지 눈을 돌리고 있다. 최근 할리우드는 <링> <검은 물밑에서>의 리메이크 판권을 각각 100만 달러, 40만 달러에 사들였다.





그렇다면 아시아권 공포 영화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을까. 일단은 앞서 지적한 대로 영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이 최대 특징이다. 사건의 실마리가 과거와 연결된다는 점도 특징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아시아권 공포 영화에서는 단순히 꿈을 꾸다가 또는 캠핑을 갔다가 생판 낯모르는 ‘사이코 살인마’에게 무자비하게 살육당하는, 할리우드 식의 구도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보다 이들 영화의 주인공들은 과거의 업보나 원한에 묶여 저주받고 상처입는다. 이를테면 이혼하고 어린 딸과 단둘이 사는 <검은 물밑에서>의 여주인공은 부모 사랑에 굶주린 채 물 탱크에 빠져 죽어간 한 어린아이의 원귀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


정체성 혼돈·대중 불안 심리 반영


주인공의 90% 이상이 여성이라는 것 또한 아시아 공포 영화의 특성이다. ‘연약한 여성이 힘센 괴물(남성)을 마침내 처치함으로써 대리 쾌감을 선사하는’ 할리우드 공포물과 달리 아시아 영화에 등장하는 귀신은 대부분 여성이다. 억압적인 가부장 사회에서 쌓인 여성들의 한이 여귀로 육화해 나타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번에 소개될 영화의 여주인공들이 싱글 마더(<검은 물밑에서>)나 독신 커리어 우먼(<폰>)처럼 이른바 정상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8월에 개봉할 국산 공포 영화 <하얀방>에서도 스팸메일을 타고 이동하는 원귀의 최종 타깃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 낙태를 서슴지 않는 미혼 여성들이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최근 ‘한국의 공포영화 연구’라는 박사 학위 논문을 쓴 백문임씨(영화 평론가)에 따르면, 전통적인 가족 제도를 이탈한 여성은 본래부터 공포 영화의 단골 주인공감이었다. 공포 영화는 장르 특성상 전통 사회가 붕괴하는 데 따른 대중의 불안 심리를 무의식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홍콩발 공포 영화가 늘어난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쓰리>에 참여한 천커신 감독은 공포 영화를 통해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홍콩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정체성 혼돈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세계화의 광풍이 아시아를 휩쓰는 이즈음, 그것은 비단 홍콩만의 혼돈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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