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마음 깨우는 ‘눈’ 부신 두메의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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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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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떠나면 좋을 겨울 여행지 3선


설연휴와 아이들 봄방학으로 모처럼 도시 사람들의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그러나 따분하게 집안에서 뒹굴며 텔레비전만 보아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낡은 생각과 낡은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집 밖으로 나서야 한다. 그래야 문명이 내뿜는 ‘독’에서 벗어나 뭐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마음에 여유를 깃들게 할 겨울 여행지 세 곳을 소개한다.


눈 내리는 날 섶다리 위에 서면


올 겨울 도시에는 별로 눈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산간 마을에는 자주 폭설이 내렸다. 지금도 강원도 쪽으로 여행하면 응달진 산자락에 흰 눈을 모자처럼 뒤집어쓴 채 납작하게 찌부러져 있는 집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산과 마을과 하늘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드는 뽀얀 눈보라도 만날 수 있다.


적요를 느끼며 눈이 얹힌 비경을 감상할 만한 곳으로는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판운리가 꼽힌다. 워낙 깊은 산간이어서 눈이 녹지 않은 데다, 그 유명한 섶다리가 있어서 두메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이다. 판운리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앞에 아른사른, 섶다리(솔갑다리)가 강줄기를 가로질러 지네발처럼 나 있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동네 장정들이 이틀 동안 힘깨나 써서 놓은 것이다.


이 곳에서는 과거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버드나무를 베어다 다릿목을 세운 뒤 솔가지를 위에 얹고, 뗏장을 떠다가 흙과 함께 덮어 해마다 섶다리를 놓았다. 본래 섶다리는 이듬해 장마가 지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마련이지만, 판운리에서는 장마 이전에 다릿목과 발판을 거두었다가 날이 추워지면 다시 내어다 쓴다. 현재 섶다리가 남아 있는 마을은 판운리가 유일한데, 눈이 내리는 날 섶다리 위에 서면 운치와 낭만이 따로 없다. 물오리와 청둥오리 떼가 강 위에서 펼치는 군무도 빼놓을 수 없는 비경이다.



‘두메 중의 두메’ 정선 너와집 마을




가는 길/새로 뚫린 중앙고속도로 신림에서 빠져 88번 국도를 타고 주천 쪽으로 간다. 주천에 이르러 평창 쪽으로 이어진 597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 보면 판운리가 나온다. 주천에서 10분 남짓 거리. 큰길에서 섶다리가 보인다.


‘두메 중의 두메’ 정선 너와집 마을


예나 지금이나 정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깊은 두메산골이다. 오죽하면 ‘앞산 뒷산에 빨랫줄을 맨다’고 했을까. 정선의 그 많은 두메 마을 가운데서도 가장 깊이 숨어 있는 마을은 동면에 자리한 북동리 함바위골과, 북평면 숙암리의 단임마을이다. 함바위골로 가자면 동면 화암에서 무치재를 넘어야 한다. 무치재부터는 비포장길로 12km나 들어가야 함바위골에 닿을 수 있는데, 이곳에는 현재 단 두 집만 남아 있다. 조용선 씨 가족과 최재규씨 가족이 그 집에 산다.


최씨네 집에 가면 특이한 물건이 두 가지 있다. 멧돼지 사냥에 쓰는 투창과, 새나 동물을 쫓을 때 쓰던 파대가 그것이다. 파대는 지게 멜빵처럼 짚(지금은 나일론 끈을 쓰기도 한다)을 길게 엮어서 만드는데, 그 길이가 3m가 넘는다. 이 파대를 칠 때 나는 ‘땅’ 하는 소리의 위력은 실로 대단해서 총소리가 무색할 정도이다.

“까마구가 와서 옥수수 막 파잽히고, 멧돼지가 감자 같은 거 막 파잽히면 이걸 한번 시게 쳐요. 그럼 이 놈들이 기겁을 하고 쫓겨가요. 소리가 음청 커요.” 하지만 최씨는 파대를 쳐서 새를 쫓을 만큼 농사를 많이 짓지는 않고 있다. 기껏해야 강냉이와 무꾸(무) 농사가 전부다. 그래도 그는 이 곳이 조용하고, 공기 좋고, 물이 좋아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북평면 숙암리 단임마을도 물 좋고 조용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곳이다. 단임마을 가는 길 또한 비포장길로 12km를 가야 하는 먼 길이다. 단임마을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집은 본체가 귀틀로 된 너와집인데, 요즘은 지붕 위에 푸른 천막을 들씌워놓았다. 비는 가려야 하겠고, 군청에서는 너와를 걷어내지 말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천막을 친 것이다.


너와집을 벗어나 한참을 더 올라가면 동네 반장인 심상복씨네 집이다. 이 곳에는 요즘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성주(집안 신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의 신체를 만날 수가 있다. 본래 성주는 집을 새로 지을 때 대들보 아래 모시며, 마루가 없는 집에서는 조왕신과 더불어 부엌에다 모신다. 이 곳의 성주는 무명 실타래와 한지를 접어 만들었으며, 부엌 대들보 아래 모셔져 있다.


이들 마을은 아이들과 함께 가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생전 처음 보는 풍경에 넋을 잃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옛 추억에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가는 길/영동고속도로에서 새말 인터체인지로 나가 평창을 거쳐 가는 방법(3시간)과, 하진부에서 정선으로 넘어가는 방법(3시간 10분)이 있다. 함바위골에 가려면 정선에서 424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가 화암동굴쯤에서 북동리 쪽으로 넘어간다. 화암에서 12km 넘게 걸린다. 단임마을은 정선에서 405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가 숙암리에서 단임골 계곡을 따라 12km쯤 올라가면 된다.


작지만 넉넉한 샛집 한 채


덕유산과 구천동으로 유명한 무주 땅. 이곳에는 높은 산이 여럿 물결치고 있어 유난히 두메 마을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메로 꼽히는 마을이 삼도봉 자락에 둥지를 튼 미천리 점말이다. 예로부터 이 마을은 피난지로 이름 나 있어, 나라에 난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랑 두 집만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한 집은 우리나라에 몇 남아 있지 않는 샛지붕을 해 얹었다. 샛집 주인은 아흔 살 가까운 조종민 할아버지와 김태화 할머니이다.


샛집의 본채는 한 칸짜리 귀틀로 되어 있어 방안은 늙은 내외가 발을 뻗으면 딱 맞을 정도로 작다. 그 나마 로터리식 흑백 텔레비전과 부산에서 사 왔다는 라디오와 카세트가 한 구석을 차지해 방은 더 좁아 보인다. 다른 쪽 구석에는 할아버지가 낙서 삼아 쓴 일기와 한서들이 있고, 잡동사니가 빼곡이 쌓여 있다.




오막살이 샛집이다 보니 부엌도 억새로 벽막음을 한 채로 그냥 바깥에 나 있다. 찬바람이 불면 그대로 찬바람이 통하는 부엌. 여기에는 옛날 조왕신을 모시던 조왕중발이라는 턱받이가 있지만, 지금은 촛대 구실만 한다. 하지만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이 집이 비좁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집’이라고 자신이 사는 샛집을 자랑스러워한다. “장에 나다니는 게 좀 불펜하지. 딴 거는 괜찮에유. 겨울께는 또 큰아들네 가 있구 그래유. 원래 친척이 여 살아서 오라 그래 들어오긴 했는데, 지끔은 외려 우리만 남았네유.”


눈이 녹을 때쯤 찾아가면, 어렵게 살아왔을지언정 몸과 마음이 한없이 편안한 샛집 노인네들로부터 삶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가는 길/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까지 가서 최근에 새로 생긴 대전과 무주를 잇는 고속도로를 이용한다. 무주에서 설천으로 가려면 다시 30번 국도를 타고 남대천을 거슬러오른다. 미천리는 설천 면소재지에서 15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된다.

글·이용한(시인)/사진·안홍범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연출한 ‘사칠변론’은 한국 지성사의 일대 장관이자 매혹의 풍경이다. 조선 성리학의 학맥과 당파를 가르는 이론적 단초가 된 사단칠정론 정립 과정과, 당대의 거유 퇴계와 26세 연하인 신진 학자 고봉이 13년에 걸쳐 나눈 학문과 인품의 교유를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무식한’ 독자는 자못 삼엄한 학문의 장관보다는, 인간적 습기와 체온을 간직한 매혹의 풍경 쪽에 아무래도 시선이 쏠린다. 신라 향가보다 그 배경 설화에 더 큰 재미를 느끼는 것처럼, 사칠변론의 뼈를 이루는 사단칠정론보다는 그 뼈에 살을 입히고 피를 돌게 한 두 사람의 사연이 더 궁금하다는 것이다.





퇴계와 고봉이 주고받은 편지를 한데 묶은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김영두 옮김, 소나무 펴냄)는 그같은 기대에 제대로 부응한다. 편지는 의외로 퇴계가 먼저 썼다. 과거 시험차 서울에 왔다가 당시 성균관 대사성이던 퇴계를 찾아와 논쟁을 벌인 고봉의 ‘당돌한’ 열정과 패기가 기꺼웠는지, 급제 후 낙향해 있던 고봉에게 1558년 겨울에 첫 편지를 보낸 것. 이후 퇴계가 세상을 뜨는 1570년까지 두 사람의 서신 왕래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서로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과 존경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학문과 처신에 문제가 있다 싶으면 따끔한 훈수와 이의 제기도 감추지 않았다.


가령, 고봉과 하룻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을 두고 퇴계는 ‘십년 동안 책을 읽은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어느 편지에서는 ‘(고봉에게) 술을 좋아하는 병폐가 있다’고 들었다며 넌지시 충고하자, 고봉이 부끄러워하며 ‘근자에 병이 잦아 끊었다’고 답신한 식이다. 퇴계는 또, 고봉이 선조에게 자신을 극찬하며 왕의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접하곤 당분간 왕래를 끊자며 고봉을 나무라는편지를 보내는데, 이에 고봉은 진의를 해명하느라 거듭 붓을 들어야 했다.


이처럼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일상의 안부를 통해 이 책은, 학문에 치열하고 처신에 엄정하지만 인간미 지극한 조선 선비의 초상과 풍속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 핸드폰 수다와 e메일 잡담만 교환되는 이 참을 수 없는 훤소(喧騷)의 시대에, 이제는 박물관 유물처럼 되어버린 옛 편지글의 진중한 형식미에 한번쯤 푹 빠져보는 것도 썩 괜찮은 독서 체험이 되지 싶다. 연대순으로 편집하되, 학문에 대한 본격적 논의를 담은 편지들은 책 뒤쪽에 따로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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