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료를 안 쳤더니…”
  • 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2.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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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10주년 맞은 MBC <수요예술무대> 한봉근 PD
매주 수요일 밤 자정을 넘은 시간에 방영되는 MBC <수요예술무대>가 10년째 장수하고 있는 것은 방송가의 불가사의이다. 클래식과 재즈 음악 위주로 편성된 이 프로는 개편 때마다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다. ‘개인기’가 넘쳐나는 방송가에서 어눌하고 밋밋한 김광민씨(42)와 이현우씨(36)가 진행자 자리를 계속 지키는 것도 드문 일이다(김씨는 1993년, 이씨는 1997년
부터 사회를 맡고 있다).


한봉근 PD(44)는 이 프로그램이 장수하는 비결에 대해 “늦은 시간이어서 간부들이 잘 안 봐서 그런 것 같다”라며 농담을 던졌다. <이소라의 프로포즈>나 <열린 음악회>에 비하면 <수요예술무대>는 조촐하다. 그런데도 이 프로그램이 이처럼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은 음악의 맛을 아는 마니아들의 힘이다. 화학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고 제대로 맛을 낸 진국 같은 음악을 듣기 위해 그들은 <마감 뉴스>를 보고도 텔레비전 시청을 ‘마감’하지 않고 예술 무대를 기다린다.


뛰어난 섭외력으로 외국 거물 뮤지션들 ‘포섭’


한양대에서 작곡을 전공한 음악도 출신답게 한PD는 출연자 섭외가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있다. “어설프게 방송에서 클래식을 들려줄 경우 오히려 ‘클래식은 재미없다’는 선입관만 키울 수 있다. 그래서 클래식의 참 매력을 느끼게 해줄 만한 최고의 음악가를 섭외하기 위해 노력한다.”



실제로 재즈피아니스트 허비 행콕, 색소폰 연주자 케니 지를 비롯해 척 멘지오니·안드레아스 숄·사라 브라이트만 등 그동안 <수요예술무대>를 거쳐간 뮤지션들의 면면은 무척 화려하다. 1회 출연료가 30만원에 불과한 <수요예술무대>에 이런 거물들을 출연시키기 위해 한PD는 독특한 섭외 방식을 썼다. “출연료를 안 주는 대신 영원히 기억에 남을 멋진 무대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식으로 물꼬를 트자 그 다음부터는 앞에 나왔던 출연자들의 면면을 보고 대부분 출연에 응해 주었다.”


이들 외국 뮤지션에게 <웬즈데이(Wednesday)>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수요예술무대>는 한국에 오면 꼭 한 번 서야 할 무대로 꼽힌다. ‘댄스 공화국’인 한국에서 그들의 음악을 들어줄 팬과 직접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연이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미국이나 일본에도 매주 클래식 음악을 실황으로 중계하는 공중파 방송은 없다’며 프로그램을 지속해 달라
고 부탁하는 뮤지션도 있다.

성악가 중에서는 홍혜경·신영옥·조수미씨가 <수요예술무대>에 자주 출연하는 편이다. 한PD는 그들이 시청자에게 좀더 다가갈 수 있도록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한번은 조수미씨에게 체육관에서 공연하도록 한 적이 있다. 조씨는 난감해 했지만 나중에 관객들이 열렬히 호응하는 것을 보고 가장 아름다운 무대였다고 좋아했다.” <수요예술무대>는 조씨가 핸드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유일한 공연이 되었다. 한PD는 “시청자와 뮤지션 들의 지지가 지금만 같다면 앞으로 10년은 더 <수요예술무대>를 지킬 수 있다”라고 장담했다.






거장이라고 해서 꼭 걸작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거장의 필모그래피에는 걸작과 졸작이 나란히 등재되어 있고, 때로는 두어 편의 걸작만으로도 거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장이머우는 베를린과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았고 <귀주 이야기>와 <인생> 등 걸작을 만든 감독이다. 하지만 신작 <영웅>은 겉만 번지르르한 실패작이다. 량차오웨이와 장만위, 리롄제와 장쯔이라는 중화권 최고 스타들을 모아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진의 군대를 부활시킨 엄청난 물량 공세로 만들어진 <영웅>은 맥락과 상관없이 멋진 액션 장면 몇 개만 겨우 건질 수 있는 영화다.





<영웅>의 무대는 진시황이 아직 영정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대륙을 통일해 가던 시기다. 수많은 나라를 힘으로 굴복시킨 영정에게는 끊임없이 자객들이 습격한다. 어느 날 무명이라는 남자가 찾아와 영정이 가장 두려워하던 자객인 파검과 비설을 죽였다고 말한다. 무명은 시기와 질투심을 이용하여 연인인 파검과 비설을 갈라놓고 죽였다고 했다. 그러자 영정은 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파검과 비설은 한낱 질투심 때문에 자멸할 사람들이 아니라며, 아마도 당신(무명)은 나를 죽이러 온 자객이고, 파검과 비설은 대의를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했을 것이라고.


어긋난 상황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부족해


<영웅>은 무명과 영정의 대화를 따라 장면이 펼쳐진다. 무명이 상황을 설명하면 그대로 장면이 펼쳐지고, 다시 영정이 뒤집어서 설명하면 그렇게 상황이 바뀌어 버린다. 말하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다른 상황이 전개되는 형식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서 시작된 것이다. 구로사와는 다양한 사람의 진술을 통해 현실의 가려진 이면을 드러내고, 과연 진실이란 존재하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영웅>에는 그런 진지한 물음이나 어긋난 상황이 만들어내는 긴장이 없다.


<영웅>의 색채 감각은 여전히 뛰어나다. 파검과 비설의 옷은 무명이 말할 때와 영정이 말할 때 색깔이 바뀐다. 그들의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숲에서 싸울 때에도 나무와 나뭇잎의 색깔이 자유자재로 바뀐다. 하지만 <붉은 수수밭>에서 보여준, 강렬한 색채가 인도하는 황홀경은 없다. <영웅>의 색깔은 단순히 상황과 감정의 전형적인 설명밖에 하지 못한다.


<영웅>을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와호장룡>이 떠오른다. 북미에서만 1억 달러 흥행을 기록한 <와호장룡>은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으며 무협 영화 붐을 일으켰다. 가장 중국적인 무협 영화가 세계를 사로잡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장이머우는 ‘남방적인 <와호장룡>과는 다른 북방적인 무협 영화’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붉은 수수밭> 등 초기작들이 보여준 강렬한 색채를 다시 사용한 것말고는 새로운 것이 없다. <영웅>은 <와호장룡>처럼 사막 풍경이 나오고, 나무 위에서 싸움을 벌이고, 주인공은 쓸쓸하게 죽어간다. <영웅>은 <와호장룡>에 열광했던 서양 관객들을 현혹하겠다는 목적 의식이 너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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