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대남 가고, 꽃미남 오라"
  • 김은남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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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 '미소년 예찬' 봇물…
미남 선발대회·에세이집 출간 등 잇따라


미소년 예찬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바야흐로 미소년 전성 시대이다. 미소년은 더 이상 10대 소녀만의 취향이 아니다. 20∼30대 여성을 겨냥한 상업적 마케팅에도 이른바 '꽃미남'이 대거 미끼로 등장하고 있다.


"억눌려온 여성들의 성적 욕망 발현"




여성 포털 사이트인 w21.net은 최근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에 유자 주스를 납품하게 되면서, 입점 행사 도우미로 미소년들을 선발했다. 식품매장 행사에 남자 도우미를 세운 전례가 없다는 백화점측 거부 반응을 무시하고 이 회사는 여성 고객을 노골적으로 유혹했다. "꽃미남도 보고 주스도 마시러 오세요."


인터넷 업체인 조이헌트는 오는 10월19일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잘생긴 남자 선발대회'를 연다. 근육질 '람보'가 활보하던, '남성을 위한, 남성만의 잔치'였던 미스터코리아 대회와 달리 여성의 눈높이에 맞춘 본격적인 미남 선발 대회가 처음 열리게 되는 셈이다. 한국에서 이런 대회는 시기 상조가 아닐까 우려하던 주최측은 놀라고 말았다. 인터넷에서 네티즌 투표로 진행된 예심에 몰려든 여성 천여 명은 꽃미남 후보에 대한 관전평을 거침없이 쏟아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급기야는 〈나는 미소년이 좋다〉(해냄출판사)고 만천하에 선언한 여성까지 등장했다. '마광수 교수의 애제자'라고 자처하는 남승희씨가 그 사람이다. 그녀는 미소년 자체보다 여성들이 미소년을 좋아하는 현상, 나아가 여성들이 이같은 기호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게 된 현상에 주목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자여, 이제 너를 감상하마' : <나는 미소년이 좋다>를 쓴 남승희씨는 남성도 적극 상품화해야 한다는 '맞불론'을 편다(맨 왼쪽). 오른쪽은 '제1회 잘생긴 남자 선발대회' 예심을 통과한 남성 후보들.


남씨에 따르면, 미소년은 '잘생긴 남자'와는 조금 다르다. 잘생긴 남자가, 백마를 타고 와 자기를 낚아채 주었으면 하는 이상형의 왕자에 가깝다면, 미소년은 '샤워 중이거나 자고 있을 때나, 혹은 아무 때나 덮치고 싶은, 즉 가지고 싶고 어루만지고 싶고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은' 남자이다.


발칙하기 이를 데 없다고? 그러나 남씨 생각에 공감하는 여성이 의외로 적지 않은 듯하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미소년 애호 사이트가 수십 개 눈에 띈다. 이들 사이트는 이름부터가 사뭇 도발적이다. 미소년으로 손꼽히는 가수 노유민(댄스 그룹 NRG 멤버)의 개인 팬 사이트를 예로 들면 이런 식이다. '희롱하세 노유민' '납치하자 노유민' '노유민 습격 사건'.


성 희롱 소송에 걸릴 법한 이같은 표현에서 눈에 띄는 것이 성적인 권력 관계의 뒤집힘이다. 성적인 관계에서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져 온 여성들이 이제는 언제라도 덮칠 수 있는 남자, 곧 섬세하고 고분고분하고 세상 때가 덜 묻은 '어리씽씽한 남자'를 탐하고 있는 것이다. w21.net 김재희 이사는 이같은 미소년 애호 현상에서 그동안 억눌려 온 여성들의 성적 욕망이 발현되는 징후를 읽어냈다.


이들 미소년은 현실을 지배하는 남성상과 180° 다르다. 남승희씨의 말마따나 이들은 힘을 과시하는 법이 없다. 남자들과의 우정을 과시하는 제스처도 하지 않는다. '쓸데없이 잘난 체하고 자기를 떠받들어 주기만을 바라는 짜증 나는 한국 남자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캐릭터', 이것이 바로 미소년이 가진 매력의 원천이다.




중요한 것은, 미소년들이 더 이상 여성들의 성적 판타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텔레비전과 거리에는 이미 미소년이 넘쳐난다. 미소년이 되기에 선천적으로 미모가 딸리는 젊은 남자들은 차선책으로 '귀엽게' 보이는 데 골몰한다. 만만하고 사랑스러운 상대라는 점에서 귀여운 남자와 미소년은 닮은꼴이다.


여성들은 미소년과 더불어 귀여운 남자에 대한 선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잘생긴 남자 선발 대회를 주최한 조이헌트사는 대회 초반 곤욕을 치렀다. 잘생긴 남자-터프가이-섹시한 남자-귀여운 남자 순으로 입상 순위를 매긴 데 대해 여성 네티즌의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누가 터프가이 따위를 좋아하느냐'는 비난에 밀린 회사측은 여론조사를 해 입상 순위를 잘생긴 남자-귀여운 남자-섹시한 남자-터프가이 순으로 재조정했다. 이 회사 최윤엽 대표는 "이번 대회를 치르면서 여성들이 좋아하는 남성상이 급변하고 있음을 실감했다"라고 말했다.


"신세대 남자에게 '귀엽다'는 말은 최대 찬사"


이같은 분위기를 일찌감치 간파한 신세대들은 '귀여운 남자=남자답지 못한 남자'라는 기성 관념을 구닥다리로 치부한다. 이번 대회에서 귀여운 남자 부문 본선에 오른 박인철군(20·국민대 연극영화과)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 남자에게 귀엽다는 말은 최대의 찬사이다. 여자애들한테 그 말을 듣고 싶어 귀여운 척 '오버'하는 애들도 숱하게 널려 있다."


미소년 범람은, 1차적으로 한국 여성이 현실적인 권력을 획득해 가고 있음을 반증한다. 돈과 권력으로 여자를 지켜주는 '떡대남'보다 미소년의 '뽀사시한 피부'와 말랑말랑한 몸에 매혹되는, 여성들의 새롭고 독립적인 미감(美感)은 권력의 기반 없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기반은 아직 턱없이 허약하다. 여성의 대다수는 여전히 자신의 욕망을 깨닫지 못한다. 이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남승희씨는, 남성의 성(性) 또한 적극적으로 상품화해야 한다는 이른바 '맞불론'을 편다.


단, 그가 제안한 방식은 여성을 상품화해 온 기존 방식과 중요한 차별점을 갖고 있다.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서로를 존중하는 남녀가 사심 없이 상대에게 욕망을 품을 때 인류 문화는 새롭게 발전할 수 있다고 남씨는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남성 또한 자신의 색(色)을 마음껏 발현하게 됨으로써 유사 이래 남성을 옥죄어 온 '남자다움'이라는 족쇄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자다움의 족쇄를 상당 부분 벗어 던진 미소년은, 그런 의미에서 따져 보자면 진화 단계에 가장 근접한 남성이기도 하다. 여성들은 오늘도 이렇게 주문한다. "꽃미남이여, 영원히! 우리는 단지 너희에게 아름다울 것만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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