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한국의 시대 상황이 '남명 사상' 부른다
  • 경남 산청·박병출 부산 주재기자 ()
  • 승인 2001.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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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식 선생 탄생 500주년 국제 학술회의


그는 유가(儒家)의 도를 닦고도 벼슬길에 나아가려 하지 않았고, 왕이 부르면 소(疏)를 올려 사양했다. 평생을 산중독서인(山中讀書人)으로 살다가, 명정(銘旌)에 '처사(處士)'라고 적으라 유언하고 죽었다. 이를 두고 우암 송시열은 '깎아 세운 만 길 기상은 해와 달같이 밝게 빛났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율곡 이 이는 '학문에는 실로 본 것이 없고 상소한 글도 경제의 계책은 아니니, 비록 세상에 나와 시행함이 있었더라도 능히 정치에 성공했으리라고 기약할 수 없다'라고 낮추어 평했다.




위대한 스승을 찾아서 : 남명 조 식 선생 탄신 500주년을 맞아 후손과 유생 들이 '남명제'를 지내기 위해 제실로 향하고 있다(오른쪽). 맨 오른쪽은 남명의 초상화.


남명 조 식(1501∼1572)이 탄생 500주년을 맞아 거듭나고 있다. 추모 열기와 함께, 은일(隱逸)의 선비라는 종래 평가 대신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으로 각광받는 것이다. 8월 16일과 17일, 남명 유적이 있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삼성산청연수원에서 '남명학과 21세기 유교 부흥운동 전개'라는 주제로 제1회 국제 학술회의가 열렸다. 남명학연구원(이사장 권순찬)이 주관한 이 행사에는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등에서 발표·토론자 20여 명과 국내 남명 연구자 100여 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하루 두 차례 10분씩의 휴식 시간과 식사 시간까지 줄여가며 종일 열띤 토론을 벌였다.


김충렬 남명학연구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은 기조 논문 발표를 통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은 명나라 유학자 안 원(1635∼1704)의 '정주학을 깨쳐야 공맹학이 산다'라는 말로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조선조 유학에서 남명의 위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담론과 저술 중심으로 변질한 조선조 유교의 정주학(程朱學·성리학)을 버리고 공맹(孔孟)의 실천 유학으로 되돌아 가자고 주창한 이가 남명이라고 강조했다.


'임진왜란 3대 의병장' 모두 남명 문하생




큰 뜻 기리기 : '남명제'(왼쪽)를 올리려고 남명의 후손과 유생 들이 덕천서원에 모였다(맨 왼쪽).


'남명학파의 의병 활동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발표한 일본 나고야 대학 나누키 마사유키(貫井正之) 교수는 "일본군이 조선 침략 지배에 최종적으로 좌절한 것은 경상도 통치에 실패했기 때문이며, 그것은 경상도의 의병 창의에 기인했다"라고 분석하고, '임진왜란 3대 의병장'인 정인홍·김 정·곽재우가 모두 남명의 문하라는 데 주목했다. 그는 "학문적으로 대립한 남명학파와 퇴계학파가 의병 활동에서는 어떤 차이를 보였는지도 앞으로 연구 과제로 삼을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대진대 권인호 교수는 남명의 문인으로서 인조반정 때 참형되어 남명학파의 몰락을 부른 정인홍(1535∼1623)이 현실 정치에서 주창한 남명 사상을 집중 조명해 관심을 끌었다. 권교수는 정인홍이 비록 광해군 아래서 왕권강화론을 폈지만 개인이나 당파의 권력을 위해 왕권을 이용한 보수적 사림파와 달리 '임금의 뜻을 얻어 민본 정치를 펴려고(得君行道)' 시도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관리들의 비리를 엄하게 다스리고 민간에 은광 채굴을 허가했으며, 민중 수탈을 막으려고 대동법을 실시한 정인홍의 진보적 민중 정치가 '유학의 근본을 밝히고 경세와 시무를 겸비한다(明體達用)'는 남명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라고 보았다.


발표자들의 견해가 일치한 부분은, 남명이 같은 해 태어난 퇴계 이 황(1501∼1570)과 더불어 조선 중기 유학의 두 거봉으로 우뚝 서고도 위상과 역할이 상대적으로 과소 평가되어 왔다고 본 점이다. 이들은 퇴계가 여러 대에 걸쳐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친 것과 달리 남명은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일관한 점, 문하생 중 대표적 인물인 정인홍이 인조반정으로 참수되어 구심체를 잃은 점 등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정인홍은 특히 1604년 〈남명집〉을 간행하면서 말미에 남명을 비판한 퇴계를 반박하는 글을 실어 당시 조정의 주류였던 퇴계학파와 정면으로 맞섰다. 이에 성균관 유생 정호성 등이 전국의 서원과 향교에 사발통문을 돌려 정인홍을 규탄하고, 정인홍은 후일 광해군에게 퇴계를 문묘에 배향한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린다. 이로써 한때 '일문양사(一門兩師)'로 일컬어졌던 두 학파가 영원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세력이 약해져 정치적·학문적 이적(移籍)을 통해 남인이나 노론으로 흡수되어 간 남명학파가 '종조(宗祖)'를 제대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것은 일면 당연한 결과였다.


'16세기형 IMF 사태' 때 빛났던 남명의 정신




선비문화 축제 : 남명이 만년을 보낸 경남 산청군은 의병 출정식(위 왼쪽·오른쪽), 남명의 새애를 담은 서사극 <선비정신의 표상 남명>(위 가운데), 한시 백일장 등 각종 행사를 열었다. 특히 시골 난장에서 펼쳐진 <선비정신의 표상 남명>에는 5천명이 넘는 관객이 몰려들었다.


〈남명 문학의 철학적 접근〉 〈남명 설화 뜻풀이〉 등의 책을 펴낸 정이락 교수(영산대)는 "정인홍은 뛰어난 제자였으나 그가 없었다면 남명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남명은 인조반정 이후 4백년 이상 학문적 복권이 되지 못한 채 소외되어 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감대가 넓어져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권인호 교수(대진대) 역시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시대 상황이, 남명 때와 너무나 흡사하다. 이 시대가 남명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남명이 살았던 16세기는 권력을 둘러싼 암투로 사화(士禍)가 끊이지 않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시기이다. 권교수는 "당시 권력층은 나라의 세금을 횡령하고 민중을 수탈하는 도둑이었다. 급기야 백성들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산도둑 신세로 전락하는 등 '16세기형 IMF 사태'를 맞았다. 심각한 정쟁과 경제난 속에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지고 있는 지금, 민생의 근본이 경제가 아닌 정치의 도덕성에 있다고 강조한 남명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남명은 일곱 번에 걸쳐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물리쳤다. 자신의 뜻을 펴기에는 시의(時宜)와 조정의 개혁 의지가 따르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1555년 단성 현감을 제수받고 올린 '을묘사직소'는 서슬 퍼런 직언으로 유명하다. '단성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상소문에서 남명은 '자전(대비)은 생각은 깊으나 깊숙한 궁궐 속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어리니 돌아간 선왕의 외로운 아들에 불과하다'라며 조정의 무능과 부정부패로 '하늘은 임금을 버렸고 나라는 근본부터 망해가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는 구차하게 따르지 않고 비굴하게 침묵하지 않았다. 추상적 고도(古道)로서의 학문이 아니라 현실을 고뇌한 남명의 정신이 새삼 유효한 것은, 우리 정치가 5백년 동안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남명은 자신의 정신 세계를 '경·의(敬義)' 두 글자로 집약했다. 패검(佩劍)에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이요 밖으로 결단하는 것이 의이다)'라고 새겨서 지니고 다녔을 정도다. 그도 모자라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차고 다니며 소리로 경각심을 더했던 그 투철한 자세가, 시대를 뛰어넘어 후학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남명의 출생지와 연고지인 합천·산청·의령군, 김해·진주시 등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남명을 소개하는 자료를 올려놓고 있고, 남명 사상을 '전도'하기 위해 개설한 개인 홈페이지도 10여 개에 달한다.




남명 관련 학술단체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1970년대 남명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60년대부터 서울대 등에서 외롭게 남명을 재조명해 온 김충렬 교수와 손잡고 설립한 남명학연구원은 그 중심에 서 있다. 젊은 연구자들을 상임 연구원으로 계속 영입해 가며 매년 〈남명학 연구논총〉 계간 〈남명원보〉 등을 펴내는 외에 〈남명선생의 자취를 따라서〉 〈남명학파 연구〉 〈남명학파 정치철학 연구〉 〈남명선생 문인자료집〉 〈남명설화 뜻풀이〉 등 단행본을 10여 권 냈다. 경상대도 부설 남명학연구소(소장 허권수)를 두어 연구에 몰두하고, 10월에는 남명학관을 준공한다. 부산 남명학연구원, 합천 남명선생선양위원회도 최근 들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중국 시안(西安)의 여러 대학이 지난 3월 창립한 국제남명학연구회는 외국에서는 처음 만들어진 남명 관련 단체이다. 이 학회는 중국내 남명학 강의를 활성화하고 남명학 전공자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려는 취지로 설립되었다.


남명이 만년을 보낸 경남 산청군은 올해부터 '선비문화 축제'를 마련했다. 국제 학술회의도 이 행사의 하나로 열린 것이다. 지난 8월16일부터 18일까지 이어진 축제 기간에는 한시(漢詩) 백일장, 남명 캐릭터 상품 판매, 의병 출정식, 전통 관혼례 재연 행사가 열렸다. 남명의 생애를 담은 서사극 〈선비정신의 표상 남명〉도 무대에 올랐다. 〈선비정신의…〉 연출가 이윤택씨는 "이제 말 자체가 함유하고 있는 정서와 미학적 율격을 전통 지식인인 선비에서 찾아보겠다"라고 말했다. 그가 산청군의 '시골 난장'에서 벌인 개막 공연에는 5천명이 넘는 관객이 몰렸다.성에 대한 담론은 대체로 음습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성을 말하면서도 비밀과 신화의 겉옷 뒤에 숨은 알몸은 짐짓 모른 척하는 것이 보통이다. 오죽하면 음담패설이며 화장실 유머이겠는가. 그러나 <이인식의 성과학 탐사>(생각의나무)는 조금 다르다. 저자 이인식은 성을, 풍문과 소문의 밀실에서 과학의 광장으로 끌어내려(혹은 끌어올려) 만천하에 까발린다. 성 ‘문화’나 성 ‘풍속’에 관한 책을 통해 성의 흐름을 개관한 독자라면, 성의 구체적 세목(細目)들을 꼼꼼하게 챙기고 있는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인 읽을거리가 된다.





예컨대 ‘물건’은 커야 된다는 마초들의 신화는 어떻게 과학으로 번역될까? 저자에 따르면 물론 크면 좋다. 하지만 흔히 알듯 여자들이 껌벅 가기 때문이 아니다. 페니스에서 발사된 정자들은 질 속에서 난자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데,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정자를 가급적이면 질 깊숙이 밀어넣어야 하며, 따라서 난자 가까이 정자를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는 기다란 페니스가 유리하다는 식이다.


여자보다 남자가 수음을 더 많이 하는 까닭은 또 무엇일까. 주체할 수 없는 성욕 때문에? 절대 아니다. 정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늘 젊은 정자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필요 때문이다. 싱싱한 정자를 고환 속에 상비하기 위해 수음을 통해 묵은 정자들은 몸 밖으로 배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음이란 부질없이 정액을 낭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성공적인 번식을 위해 인류가 고안해낸 ‘지혜로운 전략’이 된다.


남자들이 미녀를 좋아하는 것도 저자에 따르면, ‘취향’이 아니라 ‘과학’의 문제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을 상품화한다며 비판하지만, 아름다움이야말로 진화와 생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다. 이를 일러 서양에서는 ‘미인 생존(survival of the prettiest)’이라고도 한단다. 미인 박명이 아니라 미인 장수인 셈이다. 생후 3개월밖에 안된 아기들조차 미인들을 더 오래 쳐다본다는 실험 결과도 소개된다.


과학 하는 이 치고 글 잘 쓰는 사람 없다는데 저자 이인식씨(과학문화연구소 소장)는 그런 편견을 훌쩍 뛰어넘는다. 독창적인 견해나 주장을 펴는 것이 아니라 기왕의 연구들을 정리해서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둔 책이지만 워낙 ‘성 문맹’인 탓에 넘기는 책장마다 새로운 지식들이 가득하다. 저자의 의도에는 어긋나겠지만, 술자리 같은 데서 아는 체하며 입담을 과시하는 데도 꽤 유용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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