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N트로이카 '엽기적인 그녀'들
  • 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1.08.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배우 전지현·장진영·이은주,

발랄·도발·복고 이미지로 '스타덤'


〈공동경비구역 JSA〉〈친구〉〈신라의 달밤〉 등 최근 흥행에 성공한 한국 영화의 중심에는 모두 남자 배우가 있었다. 심은하·전도연·고소영 등 걸출한 여배우들이 활약하던 1990년대 후반과 달리 영화계는 지금 심각한 여배우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여배우가 부족하다 보니 깡패 영화가 범람하는지도 모른다.




가뭄 끝 단비 : 섹시 스타 이미지가 강한 전지현은 레드, 우울한 비장미를 느끼게 하는 장진영은 블루, 순수하고 청초한 이은주는 화이트 이미지가 어울린다.


다양한 장르 실험을 통해 한국 영화의 외연이 넓어지는 요즘 영화계에서는 이들처럼 중량감 있는 여배우를 아쉬워하고 있다. 특히 N세대의 감수성을 자극할 캐릭터를 가진 새로운 여배우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다행히 가뭄 끝 단비처럼 한국 영화의 대들보가 될 반가운 여배우가 여럿 나타났다. 최근 개봉한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전지현·장진영·이은주는 자신만의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었다. 3인 3색, 저마다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영화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전지현-'고소영의 독기' 뺀 과대 발랄증


N세대에게 영화계 차세대 유망주를 꼽으라면 열이면 열 모두 전지현을 꼽는다. 이들에게 전지현의 인기는 절대적이다. 한 프린터 광고에서 강한 비트 음악에 맞추어 격렬하게 테크노 춤을 추었던 그녀는 N세대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순식간에 디지털 스타로 자리 잡았다. 노래 못하는 음치보다 춤 못 추는 '몸치'를 더 수치로 여기는 N세대에게 그녀는 확실히 매력이 있었다.


CF에서 얻은 인기를 발판으로 전지현은 스크린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하지만 영화판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청순가련' 이미지를 내세워 〈화이트 발렌타인〉에 출연했지만 흥행에 참패했다. 〈시월애〉도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만들어진 스타' '반짝 스타'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녀가 영화에서 통하지 않은 이유는 관객의 기대 심리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이미지를 지닌 그녀를 영화에서는 청순가련형 인물로만 그려냈다. 그녀에게서 생기 발랄한 에너지를 느끼기 원했던 신세대 관객은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는 이런 전지현에게 제대로 된 멍석을 깔아 주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실컷 까불고 실컷 울며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산했다. 그녀는 1980년대 〈청춘 스케치〉에서 강수연이 해낸 역할을 2000년대 〈엽기적인 그녀〉에서 재현하면서도 훨씬 업그레이드된 '엽기미'를 보여주었다. 여자들이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하고 싶어하는 것을 다 하면서도 좋고 싫음이 분명한 귀여운 '엽기녀'를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소화해낸 것이다.


곽재용 감독은 "관객들은 전지현의 '과대발랄증'을 좋아한다. 짓궂지만 모든 것을 가져도 밉지 않은 여자, 바로 왕년의 고소영의 모습이다. 하지만 고소영이 악녀적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전지현은 그 독기를 뺀 발랄함만으로도 매력을 유지한다. 그녀에게는 어두움을 밝음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라고 평했다.


전지현은 생각보다 수줍음을 많이 타고 숫기가 없는 편이다. 노는 것도 잘 모른다. 영화 속 주인공과 실제 전지현은 차이가 많이 난다. 그것을 실제 전지현처럼 보이게 한 것은 그녀의 연기력이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무한히 발전할 가능성까지 보여주었다.


장진영-중성적 매력 '물씬'




색다른 열연 : 최근 개봉한 <엽기적인 그녀> <소름> <번지점프를 하다>(왼쪽부터)에서 전지현·장진영·이은주는 뚜렷한 개성을 가진 인물을 잘 표현해 냈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니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캐릭터를 살려내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색깔을 입혔다.


1996년 CF에 데뷔하고 1997년 방송에 데뷔한 장진영은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연예계에 일찍 발을 내디뎠다. CF 50여 편에 출연했고, 〈내 안의 천사〉 〈마음이 고와야지〉 등 드라마에도 꽤 얼굴을 비친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영화에서도 그다지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청순한 여인으로 나온 〈자귀모〉는 시사회에도 가기 싫을 정도로 불만족스러웠다. 중성적인 이미지로 나온 〈반칙왕〉은 실패작은 아니었지만 내 역할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했다. 비련의 여인으로 출연한 〈싸이렌〉은 '좋은 감독을 만나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라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하지만 〈소름〉에서는 달랐다. 살인과 거친 섹스가 등장하는 〈소름〉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그녀는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소름〉의 여주인공 선영은 다중 인격을 가진 인물이다. 아이를 잃고 남편에게 얻어맞는 여자지만 단순히 감싸 주고 싶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체념한 듯 오히려 동정을 조롱하는 도도함이 엿보이는 인물이었다. 소화하기가 쉽지 않은 캐릭터였다. 이목구비가 시원한 예쁜 얼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중성적인 모습, 그러면서도 도발적인 이미지를 지닌 그녀에게 선영 역은 제격이었다.


이 영화를 위해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여성미를 '거세'하면서까지 극성을 부렸다. "여자를 버리니까 진짜 여자가 되더군요." 그녀는 신데렐라가 되기를 거부하고 어딘가에 정말 있을 것 같은 선영이 되기 위해 아낌없이 망가졌다. 〈미술관옆 동물원〉에서 심은하가 '뽀글파마'를 하고 춘희로 거듭났듯이 장진영도 긴 생머리를 버리고 선영이로 다시 태어났다.


촬영 기간 내내 그녀는 배역에 빠져 있었다. "내내 510호 선영이로 살았다. 정말 선영이가 되었다. 선영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대로 말했다. '헷갈려? 뭐가 헷갈려?' '나도 맞는 건 이골이 난 년이라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아'라는 대사는 현장에서 느낌으로 내뱉은 것이다." 〈소름〉의 윤종찬 감독은 "장진영은 대형 배우가 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앞으로 색깔 있는 배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소름〉은 어려운 숙제였던 만큼 그 결과도 값졌다. 미운 오리새끼 역할을 잘 해낸 그녀는 지난 7월 열린 부천국제영화제에서 백조가 되어 나타났다. 영화제 사무국은 그녀를 페스티벌 레이디로 선정했다.


이은주-평범한 인물도 특별하게 그려내


사랑을 숨기거나, 사랑 앞에서 주춤거리고, 사랑하는 대상에게 오히려 새침하게 대하는 여성.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모습이다. 신세대에게 이런 여성은 답답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복고 여성'도 이은주가 맡으면 모두 매력적인 인물로 탈바꿈한다. 이은주의 강점은 전도연처럼, 평범한 인물을 평범하지 않게 그려낸다는 점이다.


처음 〈송어〉에서 그녀는 〈소나기〉의 소녀처럼 수줍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자기 감정을 당차게 표현할 줄 알았던 이 소녀는 〈오 수정〉에서 좀더 영악해져서 나타났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우유부단한 성격이면서도 계산적인 수정 역을 그녀는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


얼마 후 그녀는 어엿한 숙녀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그녀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 평생 잊지 못할 여자, 남자의 가슴 속에 있는 단 한 명의 여자' 역할을 소화하며 자신만의 아우라를 가진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김대승 감독은 그녀를 "1980년대 대학생 이미지로 승부를 걸어 2000년대 대학생들에게도 통하는 유일한 배우이다"라고 평했다.


이은주는 자신이 주연한 텔레비전 드라마 〈카이스트〉의 주인공처럼 영화계에서 모범생으로 통한다. 흐트러짐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경험은 영화가 왜 좋은지를 더 분명하게 알게 해주었다"라고 말하는 그녀는 천상 영화인이다.


영화에 대해서 그녀는 "한마디로 너무 좋다"라고 말한다. 연예인이나 탤런트보다 배우라고 불리기를 더 좋아하는 그녀는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영화를 하면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며, 자신은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바로 한국 영화의 복덩이인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