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도보 순례] 850리 대장정 현장 중계②
  • 이문재 취재부장 (moon@sisapress.com)
  • 승인 2001.05.2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들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다"/'한국전쟁 지리산 희생자 위령제' 지내

도보 순례는 순항 궤도에 올라 있다. 길과 하나가 되는 도보 순례는 속도제일주의를 성찰하는 '자발적 망명'인 동시에, 온몸으로 역사와 생명을 느끼는 '상생의 기행'이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자락에서 근현대사의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를 읽어내고, 풀 한 포기, 송사리 한 마리에서도 인간중심주의의 그늘과 마주치는 것이다.

 

[5월8일(화) 6일째]

이른 아침, 순례 행렬에서 이탈했다. 그저께 개관한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을 둘러보려는 것이다. 어제, 비를 맞으며 위령제를 지냈던 외공마을 밤나무밭을 뒤로 하고 중산리 쪽으로 향한다. 취재팀과 동행한 서봉석 산청군 의원은 "원래 '지리산 평화의 집'으로 명명하려 했는데 '빨치산 토벌 전시관'이 되었다. 남북 정상이 만나 평화를 논의하는 마당에, 공비 토벌을 기념하다니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대결 논리가 낳은 '빨치산 토벌 전시관'

 
예상과 달리 전시관은 아담한 2층 건물이었다. 야외 공간에는 당시 국군이 사용했던 무기와 테마 조각, 시비 그리고 빨치산들이 사용했던 아지트가 복원되어 있고, 전시관 내부는 역사실과 생활실로 구성되어 있다. 서봉석 의원이 지적한 것처럼 전시관은 화해와 평화를 위한 교훈을 얻자고 하면서도 몇몇 군데에서는 냉전 논리가 여전했다. 조각품은 모두 국군이 인민군보다 크고 공격적이며, 여순 '반란' 사건 등 일부 용어도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있었다. 전시관은 '대결의 논리'가 낳은 결과물로 보였다. 좌와 우, 남과 북 모두 피해자라는 상생의 논리가 작동했다면 세워지기 어려운 '안보 전시관'이었다(〈시사저널〉 홈페이지 www.e-sisa.co.kr 참조).

[5월9일(수) 7일째]

새벽녘에 구름 사이로 만월이 보였다. 지리산을 시계로 본다면, 순례단은 4시에서 6시 방향으로 내려간다. 어제 허 욱 국장이 잔뜩 겁을 주었다. 오늘 코스가 세 시간은 오르막길이고, 또 세 시간은 내리막길이라는 것이다. '마의 코스'. 전체 구간 가운데 가장 길다.

오전 7시50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티타늄 광산 앞에서 출발한다. 하동, 섬진강 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맞바람. 선선하다.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지난 7일, 온종일 봄비 속을 걸었기 때문일까. 대원들은 저마다 자신감을 얻은 듯하다. 30명에 가까운 행렬이 흐트러지지 않고 가지런하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이 시점에서 회의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모든 것이다'(〈인문학과 생태학〉에서 재인용). 역사상 이 시점이 바로 지금이고, 그 지점 또한 바로 여기이다. 그리고 회의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 바로 걷기이다.

섬진강 강바람에 섞여 있는 것일까. 지리산 남서쪽 사면이 흘려보내는 바람은 상쾌하다. 삼림욕이 있으니 풍욕(風浴)도 있으리라. 순례 행렬은 싱싱한 바람 속에서 저마다 펄럭이는 깃발이었다. 깃발들이 우치(소재)를 넘어 하동읍을 지나 섬진강가에 도착한다. 내일은 순례 기간 중 단 하루뿐인 운행 조정일(휴일)이다.

 
[5월11일(금) 9일째]

마지막 맑은 강, 섬진강이 죽어가고 있었다. 어제 섬진강에서 재첩을 채취해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섬진강 하류가 바다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지리산은 신음하고 있었다. 산은 산대로 허리가 잘리고, 하천은 죽어가고 있다. 댐·핵폐기물 처리장·관광 일주 도로·골프장 등 온갖 오염 시설이 지리산 안팎을 들쑤시려 하고 있다(90쪽 상자 기사 참조).

8일 밤 진주 환경운동연합 김석봉 사무국장의 강연이 생각난다. '물이 오염된 지역은 인심도 나쁘다.' 인심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관심만은 아닐 터이다. 큰 산이나 오래된 나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한편,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기고, 물고기들이 죽을까 봐 뜨거운 개숫물은 버리지 않는 섬세한 배려가 모두 '인심'이 아닌가. 우주와 자연과 교감하던 저 인심이 하루빨리 현재화해야 할 '오래된 미래'이다.

소설 〈토지〉의 최참판댁 '신축'중

도보 순례는 시속 4km로 섬진강을 거슬러올라 악양면으로 깃든다. 〈토지〉 전반부의 무대로 널리 알려지기 이전부터 악양은 악양동천(岳陽洞天)으로 이름이 높았다. 동천은 신선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 청학동과 흡사한 개념이다. 풍수적으로 거의 완벽한 환경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리산 일대에는 악양 이외에도 화개·의신 등이 동천이라고 불린다.

악양면 면소재지에 짐을 풀고 매암 차문화박물관을 찾았다. 대원들은 박물관장 강동오씨의 안내에 따라 차(중작)를 따 보았다. 강관장은 "차를 따보아야 차값이 결코 비싸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라고 말했다. 곡우 전후에 따는 우전 같은 경우, 20년 된 숙련자가 하루 종일 따는 양이 800g 정도라고 한다. 저녁에, 하동 민주청년회와 하동사랑운동연합과 지역 주민이 모여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 반대 군민 연대의 밤'을 가졌다. 생각보다 주민들의 참여는 저조했다.

[5월12일(토) 10일째]

어젯밤, 악양의 밤하늘에는 '수박씨보다 많은' 별들이 박혀 있었다. 텐트에 누워 침낭 속으로 들어가 지형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남쪽 섬진강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는 성제봉, 뒤로는 시루봉, 왼쪽으로는 깃대봉과 칠성봉. 대원들은 커다란 삼태기의 중심에 누워 있다. 꿈에 별당아씨와 함께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간 구천(환)이나 길상이를 만나는 것은 아닐까 기대했는데, 깨고 보니 꿈 없는 잠이었다. '동천'이어서 그랬을까.

면소재지에서 내려오며 평사리 최참판댁 앞을 지난다. 악양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참판댁을 하동군이 복원하고 있는데, 사실은 복원이 아니고 소설에 그려진 대로 '신축'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문학의 위력일까, 아니면 관광 상품을 개발하지 못해 안달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얄팍한 '상술'일까, 진정 문학의 위엄이 살아 있다면 지리산에 대한 인간의 예의가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찍이 환경 전문지 〈녹색평론〉이 선언했듯이, 모든 진정한 문학은 모두 심오한 생태론이기 때문이다.

[5월13일(일) 11일째]

 
드디어 지리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것도 가장 깊은 곳으로. 원래 오전에 11km만 걷고 오후에는 지역 주민과 대화를 나누기로 했는데, 일정을 바꾸었다. 쌍계사앞 주차장을 출발해 오전에 단천골· 의신·삼정을 거쳐 빗점골까지 오르기로 했다. 의신에서부터는 등산이나 다름없는 도보 순례이다. 모두 12km.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된 곳에서 위령제를 지내기로 한 것이다.

세이암에서 단천골에 이르는 계곡은 깊고 길다. 산악의 근육은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고, 근육들이 뿜어내는 신록은 눈부시다. 크고 높은 것에서 작고 낮은 것, 오래된 것에서 막 태어난 것까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산, 지리산 속에서 도보 순례 행렬은 한없이 작아져 있다.

의신에서부터 등산로는 '빨치산 토벌 루트'로 변해 있다. 곳곳에 하동군이 세워놓은 안내판과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함양군에서도 같은 표지판들을 보았다). 명선봉(1586m) 형제봉(1442m) 덕평봉(1510m)을 모자처럼 쓰고 있는 빗점골 계곡에서 남부군의 '전설적 지도자' 이현상은 사살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죽음은 명쾌하지 않다. 당시 군경의 자료와 남부군 출신들의 증언이 엇갈린다.

시린 계곡물 바로 옆, 이현상이 사살되었다는 곳, 한 평 정도 바위 위에 제단을 차렸다. 수경 스님은 '고(故) 한국 전쟁 시 지리산 희생자 존영' 위패를 모신 뒤 "이현상이나 군경 토벌대의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 죽음들을 나의 죽음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평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죽을 것인지 파악하지 않고 살아간다.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끊고 지리산에서 희생된 죽음과 나 자신을 일치시켜라"고 말했다.

긴 묵념에 이어 추도사가 낭독되고, 음복을 했다. '토벌 루트'를 되돌아 나오며 곰곰이 생각했지만, 지리산 희생자들의 죽음과 나 자신의 삶(혹은 죽음)을 일치시키기, 그것은 순례단원들 각자가 앞으로 오래 들고 다녀야 할, 버거운 화두였다.

* 더 상세하고 다양한 내용이 〈시사저널〉 홈페이지(www.e-sisa.co.kr)에 중계되고 있습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