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짱 재벌2세’가 판치는 텔레비전 드라마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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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꼽는 여성 취향 텔레비전 드라마의 10가지 키워드
텔레비전 드라마의 문법이 바뀌고 있다. 이제 안방 극장은 온전히 여자들 차지다. 남자는 액세서리로 전락했다.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구성되던 이야기가 여자 주인공의 성공과 사랑을 중심으로 구성된다(<파리의 연인>). 삼각 관계의 중심 축도 여자다(<황태자의 첫사랑>). 남자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간택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여성의 욕망을 반영하는 데 열심이다. 아줌마의 외도(<앞집 여자>)든, 아들뻘 연하 남자와의 연애(<고독>)든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실현된다. 반면 남성은 꽃미남이든 몸짱이든 여성 입맛에 맞아야 주연 자리를 꿰어찰 수 있다.

<시사저널>은 드라마의 ‘숨겨진 1인치’로 전락한 남자들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는 직업상, 혹은 취미로 텔레비전 드라마를 요모조모 뜯어보는 남자 4명이 참가했다. 방담에 참여한 변희재(30·대중문화 평론가/KBS시청자위원) 이문환(29·소설가, <헤럴드 경제> 기자) 조충환(30·CJ엔터테인먼트) 김도현(29·드라마 마니아, 서울대 대학원) 씨가 요즘 드라마의 특징을 열 가지 키워드로 풀어냈다.

순정 만화 같은 드라마

이문환 <파리의 연인>도 그렇고, <황태자의 첫사랑>도 그렇고, 드라마의 원형이 만화 <캔디>인 것 같다. 푼수끼가 있고 볼 것 없지만 밝고 구김 없이 자란 여주인공을 집안도 좋고 인물도 좋은 남자 주인공들이 갑자기 좋아하게 되는 것이 요즘 드라마의 일반적인 법칙이다.

변희재 그래도 장르는 다양해진 것 같다. 영화의 영향 때문인지 드라마에서도 리얼리티가 강조되고 있다.

김도현 최근 드라마의 여성 캐릭터는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주인공을 둘러싼 설정은 여전히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담고 있다. 요즘 트렌디 드라마에는 재벌 2세와의 사랑,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불우한 환경, 백혈병 등 불치병, 배다른 동생과의 삼각 관계 등 네 요소가 있다.

드라마는 교묘하게 여성의 욕망을 반영한다. 드라마에 나오는 직업들이 변해가는데, 요즘은 의사가 인기다. <나는 달린다> <상두야 학교 가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의사가 등장하는데, 공대보다 의대를 선호하는 요즘 세태를 반영한 것 같다.

꽃미남에 이어 몸짱 등장

그동안 남자 연기자 중에서 육체파가 드물었는데 최근 들어 비나 권상우 에릭 같은 몸짱들이 드라마에 자주 출몰한다. 에릭이 나오는 드라마는 수영장 장면에서 시작하더라.

조충환 자세히 보면 이전의 육체파 배우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은 유승준처럼 우람한 근육과 어울리지 않는 앳된 외모를 가진 착한 마초를 선호한다. 권상우처럼 건장하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맞춤형 마초’를 좋아하는 것 같다.

몸짱은 이미 10년 전에도 나왔다. 차인표나 최민수가 그들이다. 그들을 부르는 명칭처럼 바뀐 것이 있다면 그때의 몸짱, 곧 육체파들은 주체였지만, 지금의 몸짱은 객체라는 점이다. 차인표나 최민수는 우러러보는 몸짱이었지만 권상우나 에릭은 보고 즐기는 몸짱이다.
널린 게 재벌 2세

몸짱만큼 드라마에서 애용하는 남성 캐릭터는 바로 재벌 2세다. 이제 여자들은 가난하더라도 마음만은 부자인 사람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하긴 돈보다 마음 주기가 쉬우니까.

드라마에서 소비 행위로 사랑을 표현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드라마에서 사랑은 선물과 깜짝 이벤트로 표현된다. 얼마나 자주 돈과 시간을 들여 그런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가 경쟁력이다. 그런 걸 보여주는 남자 주인공이 재벌 2세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상품 간접 광고(PPL)가 많이 나오는 것도 재벌 2세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인 것 같다. 외주 제작사의 경우 간접 광고 없이는 수지가 맞지 않는 여건이어서 드라마를 제작할 수 없다. 간접 광고를 하려면 아무래도 부유한 주인공이 나을 것이다.

재벌 2세 중에서도 경제력이 있지만 경제력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을 선호하는 것 같다.

‘알고 보니 재벌 2세’도 선호하는 모형이다. 일종의 보너스처럼.

알고 보니 부자라? 현실은 그 반대 아닌가? 재벌 2세가 자주 등장하는 것에 대한 색다른 분석을 보았다. 여자 탤런트들이 재벌 2세를 자주 만나니까, 재벌 2세와 연애하는 것은 잘 할 것 같아서 작가들이 일부러 그런다는 것이다. 농담이지만, 작가의 시선이 좁고 한정된 것 같다.

허술한 직업 묘사

요새 드라마 작가는 대부분 여성이다. 그런데 이들이 직장 생활을 안해봐서 그런지 직업 묘사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직업에 대한 성찰이 없다. 직업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불새>에서 남자 주인공들은 회사의 중역인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일에 대한 고민은 전혀 안하고 사랑싸움만 한다.

늘 같은 방식으로 직업을 묘사하는 것 같다. 드라마에서 유능한 직장인임을 표현하는 방식은 외국 바이어와 만나 영어로 얘기하고 악수하거나 프레젠테이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다. 의사는 가운만 입고 나오는 수준이고.

그나마 나오는 직업도 맨날 그 직업이다. 이번에 새로운 직업이 하나 나오던데, <불새>에 ‘리빙 헬퍼’라고. 그런데 종래의 파출부랑 다른 게 뭔가?

‘예쁜 파출부’ 정도 되는 것 아닌가?

사소한 직업 하나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는 것이 전문 드라마가 설 자리를 없게 하는 원흉이다. 개별 직업군 하나 제대로 묘사 못하는데 어떻게 드라마로 만들겠는가?
공부 안하는 작가들

요새 드라마를 보면 작가들이 너무 공부를 안한다는 생각이 든다. 요새 드라마의 특징 중 하나는 걷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표현할 방식이 마땅치 않아 그냥 걷는 것으로 때우려는 것이다.

걷는 장면뿐 아니다. 그 못지 않게 회상 신도 많이 나온다.

<불새>를 보면 회상 신이 스틸 컷으로 처리되는데, 뮤직 비디오 같다.

PD나 작가들 얘기를 들어보면 회상 신이 남발되는 것은 촬영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로 연장 방송을 하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조금 떴다 하면 늘리는 제작 시스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약방의 감초, 불치병

그나저나 드라마에 왜 이렇게 백혈병이 많이 나오나? 하고 많은 병중에 왜 맨날 백혈병인가? 백혈병이 사망 원인 몇 위나 되는데? 백혈병은 병이지만 아름답게 보이니까, 여성 캐릭터를 부각하기 위해 자주 이용되는 것 같다.

실재로도 백혈병이 그런가?

피 토하고 그러지 않나?

백혈병이 식상했는지 새로운 병이 나온다. 그래도 깔끔하게 죽는다는 것은 똑같다.

병명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방송 드라마는 정말 희귀병의 보고다.

연적이 된 배다른 동생

요즘 드라마를 보면 무너지는 가부장제를 뒤처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버지의 외도로 생긴 배다른 동생이 자주 연적으로 등장한다. 동생과 연적이 되어 운명적인 사랑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엇갈리면서 나타나는 갈등이 드라마의 뼈대가 된다.

정통 멜로의 공식이니까. 두 사람이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랑을 그리는 것은 그리스 비극도 마찬가지 아닌가. 다만 왜 맨날 죽음으로만 가는 것인지, 사별은 쉽게 경험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시한부 인생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정말이지 올해는 이상하게 여주인공이 많이 죽은 것 같다.

그렇다. <완전한 사랑> <로즈마리> <천국의 계단> 줄줄이 죽어 나갔다. 드라마 여주인공들이 많이 죽은 것이 기혼 남성들의 판타지를 실현시켜 주었다는 분석이 있었다. 여주인공이 죽는 것을 보면서 부인이 죽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시청자 뜻대로 움직이는 줄거리

요즘 드라마의 특징은 시청자의 반응을 곧바로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게시판 글로 반응을 체크하고 이를 반영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본다. 게시판 글이 절대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청자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리눅스 시스템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소비자 지향일 수 있는데, 문제는 펀더멘탈(기초 구조)이 튼튼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획력이 부족한 것을 네티즌에게 맡기고 있다.

시청자 의견을 반영하는 것은 장점과 단점이 있다. 장점은 인터렉티브하다는 점이고, 단점은 본래 줄거리가 왜곡된다는 것이다.

시청자 의견에 좌지우지된 드라마는 결국 성공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대장금>에서 한상궁이 죽는 부분이다. 시청자들이 한상궁을 죽이지 말라고 하자 죽음이 계속 늦춰졌다. 그런데 한상궁이 한주 한주 목숨을 연명하면서 드라마의 긴장이 떨어졌다.

박대받는 남성 취향 대하 드라마

시장 원리에 따라 앞으로도 여성 취향 드라마 위주로 만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권력의 암투나 액션을 주로 담는 남성 취향 드라마는 스케일을 요구한다. 돈은 많이 드는데 반해 위험 부담이 크다. 잘못하면 <왕의 여자>처럼 쪽박 차기 십상이다.

<왕의 여자>가 인기가 없는 이유에 대해 색다른 분석이 있었다. <왕의 여자>는 제법 완성도 높은 사극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괜찮았다. 그런데도 시청률이 형편없었던 이유는 <왕의 여자>가 3김 시대 이야기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밀실 권력이나 음모 등 남자들의 세상을 그렸기 때문에 <왕의 여자>가 외면받았다는 것이다.

대하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점은 시대 조류를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모>나 <대장금>이 <시사저널>이라면, <무인시대>는 <월간 조선>이다. 여전히 음모론에 기대고 있다.

젠더의 벽을 넘는 실험 절실

드라마에 다양한 시도가 많았으면 좋겠다. 여성의 판타지만 그려서는 젠더의 벽을 넘을 수 없다. 이제 드라마도 시장 세분화를 해야 할 때가 왔다.

<내 인생의 콩깍지> 같은 드라마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나 정리 해고 등 1970년대 초·중반에 태어난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루었다. 의미 있는 실험이었다.

여성 취향 드라마의 득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자꾸 쏟아져 나와서 시청자들이 이런 드라마에 식상해지는 것이다. 한때 조폭 영화가 홍수를 이뤘다가 이내 시들해진 것처럼 이런 드라마가 쏟아져 나오면 시장은 균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시장의 자정 작용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영화는 경쟁이 있으니까 바뀔 수 있지만 방송은 기본적으로 세 방송사의 독과점 체제다. 자유 경쟁이 아니다. 아무리 못 만들어도 최소한의 시청률은 나온다.

나는 ‘시장의 실패’라고 본다. 시장 논리에 맡겨서 이 지경이 된 것 아닌가? 방송은 공공재다. 드라마에서 KBS와 같은 공영 방송의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파격적인 실험이다. 그런데 KBS가 여기에 더 소극적이다.

‘시장의 실패’라면 스크린쿼터처럼 드라마쿼터를 둬야 하지 않을까? 장르 별로 쿼터를 줘서 일정 장르에 편중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방송사들이 합의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실현 불가능할 것 같지만.

제작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개선은 힘들 것 같다. 지금과 같은 제작 시스템에서는 드라마를 찍어내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제작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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