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메밀꽃 필 무렵, 고향 등진 이효석
  • 강원도 평창·成宇濟 기자 ()
  • 승인 1998.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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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평창군의 묘지 훼손에 분노 ‘이장’…문화 유적 보존 인식 ‘한심한 수준’
장돌뱅이 허생원과 조선달, 그리고 동이는 봉평에서 대화를 향해 80리 밤길을 걷는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1907∼1942)이 <메밀꽃 필 무렵>에서 묘사한 이 정경은 지금도 아름답게 살아 있다. 메밀은 8월 말∼9월 초 꽃이 지는 작물이지만,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의 메밀꽃은 언제나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이효석 문학을 직접 체험하러 오는 독자들을 위해 ‘이효석 마을’ 주민들이 평창군의 지원을 받아 제 철이 아닌 데도 씨를 뿌리기 때문이다.

영동고속도로를 벗어나 평창군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봉평 가는 길이 나타난다. 봉평 장터를 지나 비포장 길로 접어들면 메밀꽃 마을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평창군 지정 자랑스러운 마을 가산 메밀꽃 마을’이라는 팻말이 곳곳에 붙어 있고, 가산문학공원이며, 복원한 물레방앗간도 보인다. 소설에서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단 한번의 괴이한 인연’을 맺은 곳이다. 이효석 생가에 사는 홍종률씨(58)에 따르면, 여름 휴가철이면 좁다란 진입로가 주차장이 되어 버리고, 평소 주말에도 생가는 봉평 장터를 방불케 한다.

8m 낭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묘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은 비단 그 지역 출신 사람들만의 고향이 아니다. <메밀꽃 필 무렵>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소금을 뿌린 듯’ 꽃이 피어 있는 봉평의 메밀밭을 자기 고향 못지않게 애틋하게 여긴다. 지난 60여 년 동안 작품을 읽어 오면서 독자들은 그 땅을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이효석 문학의 산실로 기억한다.

지난 9월 초 봉평면 가까이에서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9월3일에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에 모셨던 이효석의 묘에서 이장을 둘러싸고 유족과 지역 주민들 사이에 큰 실랑이가 벌어졌으며, 9월9일 오전 이효석 부부의 뼈 항아리가 고향을 떠나 경기도 파주군 동화경모공원으로 옮겨졌다. 73년 영동고속도로를 건설하느라 진부면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지 15년 만에 묘지를 또 이장하는 ‘불상사’였다. 42년에 죽어서 고향을 찾았던 이효석이, 이번에는 후손과 평창군 간의 갈등으로 죽어서 고향을 등진 셈이다.

이효석의 무덤이 있던 자리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봉분이 사라진 곳에는 싸움의 부산물인 피켓과 플랭카드 들이 버려져 있고, 주변에는 쓰레기가 그득했다. 그보다 더 처참한 흔적은, 유족들로 하여금 이장을 강행토록 한 도로 공사 현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벼랑 가까이에 있던 묘지의 가장자리가 뭉턱 잘려나가, 묘지는 도로 위 8m 낭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형국이었다.

묘지 입구에서 만난 장평리의 한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도로를 낸다고 저렇게 깎아내렸는데 후손들이 화가 안나게 생겼는가. 고명한 선생님을 딴 데다 잘 모셔놓고 공사를 해도 해야지, 저렇게까지 파놓고 군에서 뭐 그렇게 말이 많아. 학교 아니라 학교 할애비라도 할 말은 없어.”

이효석 무덤이 파주로 옮겨간 배경은, 매스컴이 떠들썩하게 보도한 것처럼 고속도로 확장 공사 때문이 아니었다. 묘지 바로 오른편에 용평초등학교 이전 공사를 하고 있는데, 학교 진입로를 만들면서 묘역의 가장자리가 깎였다. 지난해 11월 산을 깎아 도로를 만든 공사 현장 관계자에 따르면, 이 진입로는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진입로를 하나 더 만들어 달라는 주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묘역을 깎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겨울 길을 내는 과정에서 평창군은 유족과 상의를 하지 않았다. 지난 4월 한식에 이 광경을 처음 본 이나미씨(이효석의 장녀)가 ‘아버지를 편하게 모시고 싶다’며 묘지 이장을 추진했고, 그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평창군의 반대로 불상사가 빚어졌다.
예술가들의 생가·무덤 대부분 방치

평창군은 8월26일 이나미씨가 이장 신고를 한 뒤에야 부랴부랴 협의에 나섰지만, 유족의 뜻을 꺾지 못했다. 평창군과 유족 간에 수십년 동안 쌓여 온 해묵은 감정, 서로를 비난하며 일방적으로 추진한 일들이 이효석으로 하여금 메밀꽃 마을을 떠나도록 한 것이다. 생가 복원·문학관 건립 등 기념 사업의 청사진은 화려하지만,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평창군은 메밀꽃이 한창 피어날 무렵에 이효석이 고향을 떠남으로써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었다. 묘지 이장은 평창군뿐 아니라 이효석의 문학을 사랑하고 그 무대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는 수많은 독자에게도 큰 상처를 안겼다.

이효석 묘 이장을 둘러싼 갈등과 불상사는 문화 유산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을 밝혀 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이 사건은, 경제적으로는 한때 선진국 문턱을 밟았으면서도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후진국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작가와 작품, 작품과 그 무대 사이의 상관 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작가의 생가나 무덤 들은 거의 방치되어 왔다. 각 대학 국문과 학생들이 해마다 답사 여행을 떠나는데, 막상 가볼 만한 곳이 없다. 독자들은 당연히 작가가 실제로 겪었던 삶과 고통의 흔적을 보고 싶어한다. 이같은 흔적을 우리가 돌보지 않는데 누가 우리 작가와 작품을 알아 주겠는가.” 정현기 교수(연세대·문학 평론가)의 지적이다.

문인뿐 아니라, 근·현대 예술사에 기록된 빼어난 예술가들의 생가와 무덤은 지금도 버려져 있다. 고향이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겠지만, 소설가 김원일씨는 작가가 고향에 대해 갖는 각별한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향(경남 김해시 진영읍)에 대한 내 기억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후의 6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10세 전후의 추억과 기억을 줄기차게 소설화했다. 20편에 이르는 단편이 고향을 무대로 하고 있고, 장편 <노을> <불의 제전>이 모두 고향을 배경으로 한 50년대 이야기이다. 어느 작가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10대의 기억을 여지껏 캐내 온 셈이다.”

작가에게 고향이란 이렇듯 소중하고 특별한 곳이다. 고향, 그 가운데서도 작가가 나고 자란 집을 보지 않고는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알 수 없다. 보통학교(초등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났던 이효석도 고향을 무대로 한국 단편 문학의 백미를 뽑아냈다. 대부분의 문화 선진국들이 예술가들의 흔적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문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에서 연유한다.
김달진 문학제·홍명희 문학제 큰 성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후 지역 별로 그 지역 출신 문인에 대한 재평가와 흔적 찾기 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문학제가 올해로 각각 3회째를 맞은 경남 진해의 ‘김달진 문학제’와 충북 괴산의 ‘벽초 홍명희 문학제’이다.

박태일(경남대·시인) 최영호(해군사관학교·문학 평론가) 교수 등 진해 지역 젊은 문인들이 주도한 ‘김달진 문학제’는, 2년 전 시인의 생가를 찾아냈고 지난해에는 그 앞에 안내판을 세우기도 했다. 지난 9월19∼20일 열린 문학제에는 전국의 문인 2백여 명이 참여해 성황을 이루었다. 문학제 프로그램에는 시인 생가 방문이 반드시 들어 있다.

도종환 시인이 중심이 되어 올해로 3회째를 맞는 ‘벽초 홍명희 문학제’(10월17일)는 대하 소설 <임꺽정>에 대한 문학·언어학·민속학·지리학 연구 성과들을 쌓아 왔다. 이와 더불어 ‘벽초 생가 보전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충북 괴산에 있는 <임꺽정> 탄생지를 복원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우리가 가진 문화 자산을 제대로 인식하고 넓혀 가자는 뜻으로 문학제를 열고 있다. 생가를 복원하려 애쓰는 것은 지역 바깥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빼어난 작품 세계를 널리 알리고 문화 교육의 장으로 삼자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라고 도종환 시인은 말했다.

추석을 한 달여 앞두고 작가 이효석은 메밀꽃을 뒤로 한 채 고향을 등지고 말았다. 무덤에 든 지 46년 만에 처음으로 타향에서 추석을 맞는 셈이다. 이효석의 이향(離鄕)은 문화와 문화 유적을 어떻게 보존하고 아껴야 하는지를 일러 주는 훌륭한 반면 교사(反面敎師)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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