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문화]일본을 점령하라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8.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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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개방은 ‘공략’ 기회…대중 음악·만화·애니메이션 ‘유망’
일본 대중 문화 개방 프로그램이 발표되면서 개방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온통 ‘우려’로 모아지고 있다. 일본 문화가 국내 시장을 얼마나 잠식할 것인가, 청소년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칠 것인가….

그러나 문호 개방을, 한국 문화를 일본에 수출하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는 이도 적지 않다. 공식 개방 선언이 일본 사회에 크든 작든 관심을 불러일으킬 터이고, 그것은 한국 문화가 일본 사회에 자주 노출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규모(1년 매출액 34조원)인 일본 문화 시장은, 그동안 한국뿐 아니라 외국의 문화 생산자들에게 ‘난공 불락의 성’으로 여겨져 왔다. 특정 국가의 문화를 법으로 막은 것은 아니지만, 일본은 법보다 더 견고한 벽을 쌓고 있다. 법으로 막으면 불법 해적판이나마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일본 문화 유통 담당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밀고 들어갈 틈새조차 없다.

일본 대중 문화 개방을 전후해 그 난공 불락의 벽을 넘으려는 시도들이 한국에서 하나 둘씩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도 대중 음악·만화·애니메이션 등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장르에서.

한국 대중 문화의 일본 진출은 그동안 미미하기 짝이 없었으나, 대중 음악은 비교적 역사가 깊다. 계은숙·김연자 등 트로트 가수들이 일찌감치 건너가 활동하고 있고, 조용필·서태지와아이들 같은 슈퍼 스타가 음반을 내거나 무대에 섰다.

그러나 얼마 전 일본에서 싱글 앨범( 등 일본어로 부른 2곡 수록)을 발표하고 활발하게 활동 중인 10대 댄스 그룹 S.E.S는 선배들과 다른 방식으로 일본 시장에 진출했다. 선배들이 일본 대중 음악 기획사에 개인적으로 스카우트되어 건너간 반면, S.E.S의 진출은 한국 기획사와 일본 기획사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공동 관리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앞으로 3년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6개월씩 활동한다는 조건으로, S.E.S의 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는 일본 스카이플레이닝으로부터 계약금 3억2천만원을 받았다. S.E.S가 활동하는 기간에 얻는 수익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 기획사가 7 대 3으로 나누기로 했다.
일본 기획사가 S.E.S에게 관심을 보인 데는, ‘예쁜 10대 소녀’들이 통할 것이라는 확신뿐 아니라 ‘상품 경쟁력’이 크게 작용했다. 대중 음악의 여러 장르가 공존하는 일본과 달리, 한국의 주류는 댄스 음악뿐이다. 한국에서도 댄스 음악의 선두 그룹인 S.E.S는 일본 여자 가수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박력 있는’ 춤과 노래에 능하다. 일본어가 유창하다는 사실도 큰 몫을 차지했다(멤버 가운데 1명이 재일 동포이다). 일본어에 능숙하지 않으면 일본 대중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앨범 기획에서부터 일정에 이르기까지 S.E.S의 일본 활동은 모두 일본 기획사가 맡았다. “대중 가수는 문화 상품인 만큼 일단 그쪽 입맛에 맞추어야 한다. 이렇게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그 시장을 본격적으로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다. 일본 시장 규모가 크고 프로듀서 시스템이 주도 면밀하게 가동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선 그 시장을 알고 배우는 데 주력하고 있다”라고 S.M.엔터테인먼트 정해익 실장은 말했다.

일본 시장이 난공 불락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한국과는 다른 고도의 프로듀서 시스템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일본 시장은 상품을 자체 조달할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어서 미국 문화 상품조차 끼어들 틈이 별로 없다. 일본 시장에서 힘을 발휘하는 현지 기획사와 협력하지 않고, 국내의 독자적인 힘만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삼성영상사업단이 일본의 ‘가도카와 하루키 사무소’와 애니메이션제작위원회를 결성하고 <알렉산더> 제작에 들어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13편짜리 시리즈물로, 한국과 일본은 물론 세계 시장을 겨냥한 애니메이션이다. 삼성은 여기에 40%의 지분을 가지고, 투자한 만큼 수익을 얻는 방식으로 참여했다.

합작은 폐쇄적인 일본 시장 깨는 무기

한국계로서 미국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애니메이터 피터 정이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알렉산더>는, 삼성이 합작에 참여했지만, 일본과 세계 시장에서 애니메이션 강국인 일본 덕을 톡톡히 볼 것이 틀림없다. 일본 국내외에서 일본이 가진 지명도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케팅에 필요하다면 ‘메이드 인 저팬’만을 붙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합작은 지금으로서는 폐쇄적인 일본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합작을 하다 보면 그들을 접촉할 기회가 점점 많아질 것이고, 그만큼 많이 배울 수 있다. 일본 시장에서 얻는 수익도 4 대 6으로 나누는 만큼 우리로서는 잃을 것이 전혀 없는 게임이다”라고 삼성영상사업단 길종철 애니메이션팀장은 말했다.

일본 대중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뿌리’인 출판 만화이다. 일본 만화 시장은 10조원 규모로, 한국의 20배가 넘는데다 세계에서도 가장 크다. 한국에 상륙한 지 10여 년 만에 한국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리만큼 일본 만화의 위력은 대단하다.

중견 만화가 황미나씨는 ‘만화 천국’이라는 작품을 일본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유일한 한국 작가이다. 황씨가 보기에도 일본 시장은 폐쇄적이기 짝이 없다. “그들은 만화에 관한 한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같은 생각이 뿌리 깊이 박혀 외국 작가를 기용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황씨는 일본으로 건너가 만화 주간지 <모닝>을 공략했다. 순정 판타지물인 그의 작품은 일본 작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서정적인 감동’으로 인정받아 6년째 실리고 있다. 외국 작품을 터부시하는 일본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한국의 젊은 만화가들은 일본 만화를 보고 자라서 그쪽 장점이 몸에 배어 있다. 이를 악물고 도전하면 못할 일만은 아니다”라고 황씨는 말했다. 황씨가 보기에, 일본 시장 공략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만화에 대한 국내 규제이다. 출판 만화가 애니메이션의 근간이라는 사실은 도외시한 채 청소년보호법 등으로 만화를 옭아매는 데만 힘을 쏟아서는 만화가 국내에서도 살아 남기 어렵다는 얘기이다.

일본 문화 시장이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잘만 들여다보면 공략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일본 대중 문화 비평가 김지룡씨는 “일본 대중은 우리에게 별다른 감정도 선입견도 없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한국 가수·작가 들을 자꾸 그 시장에 노출시켜 대중에게 친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KBS와 NHK가 합동 중계하는 콘서트 같은 것을 개방 협상 카드로 자꾸 들이밀 필요가 있다. 음반이든 만화든 한두 개만 ‘대박’을 터뜨리면 양상은 달라진다”라고 말했다. 선동렬 이후 이종범·조성민·이상훈이 바다를 건넜듯이, 한두 사람(작품)만 성공하면 ‘한국 선수들’에게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돈이 된다고 판단하면 자본은 국적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문화 시장이 한국의 20배에 이르는 만큼 공략만 잘한다면, 일본 문화가 한국에 진출해 얻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일본에서 활동하려는 이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일본 자본에 예속된다’는 따위의 국내에서 일고 있는 비난이다. 문화 산업 차원에서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뜻으로 좀더 넓게 볼 필요가 있다. 개방을 기회로 살리느냐, 못 살리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한테 달려 있다.” 김지룡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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