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여당은 갈팡질팡, 개혁은 오락가락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8.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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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방송위 모델·경영위원회 설치 등 놓고 ‘혼선’
요즘 방송가 사람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나오는 얘기가 있다. 새 정부의 방송 정책이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대선 이후 방송계는 방송 개혁을 공약으로 내건 야당이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에 들떠 있었다. 기대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신년사 소동’이 벌어지면서부터였다.

이는 정월 초, 원래 편성에 빠져 있던 대통령 당선자의 신년사가 갑자기 시간대를 달리해 방송 3사의 전파를 탄 사건을 말한다. 당시 사실 확인에 나선 방송 3사 노조는 대통령 당선자의 핵심 측근 ㄱ의원이 방송사 보도 책임자에게 신년사 방영을 ‘요구’하는 바람에 이런 소동이 벌어졌다는 심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방송 3사 노조는 이를 ‘ㄱ의원 개인의 과잉 충성’ 정도로 해석하고, 애써 문제삼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은 2월 들어서였다. 공보처를 폐지하고 새로 방송법을 만들어 ‘통합방송위원회’를 구성할 때까지 당분간 방송 행정 기능을 정보통신부에 두느냐 문화관광부에 두느냐를 두고 국회 정보통신위원과 문화체육공보위원 간에 마찰을 빚자, 방송계 일부에서는 ‘부서간 이해 다툼에 떠밀려 방송 개혁 의지가 퇴색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은 2월13일 호주의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만남이었다. 국민회의는 이것이 ‘해외 투자자에게 보이기 위한 상징적 만남’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방송 유관 단체는 드디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방송 3사 노조·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한국기자협회 등 16개 단체는 곧바로 ‘방송정책 정상화를 위한 방송인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하고, 새 정권이 하루아침에 머독과 데이콤의 공동 투자를 승인하려 드는 것은 ‘공론화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졸속 결정’이라고 규탄했다.

국민회의 문체공위 소속 일부 의원이 공영 방송과 상업 방송을 나누어, 새로 구성될 통합방송위가 상업 방송만을 관장하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발설하고 다닌 것은 이즈음이었다. 2월18일 방송개혁국민회의가 주최한 ‘방송정책 제2차 토론회’에서 천정배 의원(국민회의)은 통합방송위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의 독립텔레비전위원회(ITC)가 통합방송위의 바람직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제시했다. 영국은 독립텔레비전위원회가 모든 상업 방송을 감독하되, 공영 방송(BBC)은 방송사 경영위원회가 자체 감독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통합방송위가 미국의 연방커뮤니케이션위원회(FCC)처럼 공중파·케이블 텔레비전, 위성 방송을 총괄하게 만들겠다던 애초의 공약과 크게 달라진 내용이었다. 2월20일 국민회의가 연 ‘방송 정책과 방송관계법 개정 방향’ 공청회에서 주제 발표자인 이효성 교수(성균관대·언론학)는 ‘독립텔레비전위원회 모델’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했다. KBS 이사회를 실제적인 감독 기구이자 최고 의결 기구인 경영위원회로 전환한다는 구상이 그것이다.

사태가 이쯤 되자 방송가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통합방송위 모델은 갑자기 방송법 논의의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반대자들은 ‘독립텔레비전위원회 모델’로 갈 경우 △제도로나 프로그램 내용으로나 공영 방송과 상업 방송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은 현실에서 이를 구분해 규제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으며 △방송 관련 업무를 총괄하기 어렵고 △MBC의 위상이 애매하다는 점을 들어 비판했다.
“정부가 공영 방송 손에 쥐려 한다”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시각도 대두했다. 방송위원회의 한 차장급 관계자는‘KBS를 방송위원회 감독으로부터 분리하겠다는 것은, 결국 현정권이 공영 방송만은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 아니냐’며, 지난 대선 과정을 통해 방송 매체의 위력을 실감한 국민회의가 정권을 잡은 뒤 마음이 바뀐 모양이라고 비꼬았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는 ‘터무니없는 억측’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국민회의 문체공위의 한 관계자는 원래 공영 방송 정상화야말로 방송 개혁의 출발점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기구로 경영위원회 설치를 검토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공보처를 폐지한 데서 드러났듯 방송의 독립성을 보장한다는 국민회의의 기본 정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방송위 기구 축소에 이해가 걸려 있는 세력 또는 과거의 악몽에 사로잡힌 이들이 사사건건 색안경을 끼고 사태를 보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사실 경영위원회 설치는 공영 방송측 요구 사항이기도 했다. KBS 이석우 정책연구실장은 현재 6 대 4 비율로 되어 있는 광고 대 수신료 수입 비중을 개선해 권력뿐 아니라 자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화를 선도하고 통일에 대비한 방송 기금을 마련하는 등 KBS가 명실상부한 공영 방송으로 바로 서려면, KBS의 위상과 기능에 대한 별도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도가 순수했다 해도 국민회의가 공론화 방식에서 서툴렀다는 비판은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집권하기 전에 국민회의는 틈만 나면 90년에 방송법이 얼마나 졸속으로 개정되었는지 비판해 왔다. 그런데 국민회의마저 방송법 개정이 시급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마당에 ‘설익은’ 발상을 던짐으로써 스스로 ‘졸속’이라는 혐의를 불러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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