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비평]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 진중권 (문화 평론가) ()
  • 승인 1998.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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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태극기 달기 운동을 통해 경제를 되살리려 하는 것 같다. 태극기를 단다고 경제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제 나라 국기를 부적 삼아 달고 다니며 그 효험을 기대할 만큼 어리석단 말인가?”
2년 만에 돌아온 조국. 공항에 도착하니 먼저 대한항공기 꼬리에 붙은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왜 한국 비행기에만 국기를 붙이는 걸까?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월드컵 경기 때, 유독 한국 선수들만 가슴에 국기를 달았던 것이 생각난다. 왜 그럴까? 공항을 빠져나오니 길 양편으로 태극기가 물결친다. 제헌 50주년을 맞아 광복절까지 태극기 달기 운동을 벌인단다. 또 운동?

아파트로 들어서자 정문에 태극기, 건물 입구에 또 태극기. 그러고 보니 아파트 베란다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태극기가 걸려 있다. 종로에 나갔다. 자가용 승용차에도 태극기, 택시에도 태극기, 버스에도 태극기, 가방에도 태극기, 콜라에도 태극기, 광고에도 태극기, 듣자 하니 양말에도 태극기. 태극기를 보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왜 이렇게 열심히 태극기를 다는 걸까? 내 나름으로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보았다. 첫째, 한국인은 조국을 사랑해서 그런다. 하지만 이 가설에는 문제가 있다. 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한가지일 텐데, 그 어느 나라도 전국을 국기로 도배하거나 굳이 이마에 국기를 붙이고 다니며 자기 애국심을 자백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인은 제헌절과 광복절을 뜻 깊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한 달을 뜻 깊게 기린다는 것이다. 이 가설에도 문제가 있다. 제헌절과 광복절 사이에는 한 달이라는 기간이 있는데, 실제로 일본의 항복 선언과 헌법 공포에 한 달이 걸렸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한 달이나 뜻 깊게 보낼 이유가 없다. 또 국경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거늘 1년 3백65일 늘 뜻 깊게 살 수는 없잖은가.

셋째, 한국인은 태극기 달기 운동을 통해 경제를 되살리려 한다.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태극기를 단다고 무너진 경제가 다시 살지는 않는다. 문화 민족을 자랑하는 한국인들이 제 나라 국기를 부적 삼아 달고 다니며 그 효험을 기대할 만큼 어리석단 말인가?

넷째, 미학적 이유에서다. 혹시 태극기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국기여서 저렇게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이 가설에도 문제가 있다. 태극기가 아름다운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잖은가. 그런데 갑자기 웬 열풍?

그럼 대체 왜? 마지막 가설. 베를린 한글 학교의 선생으로 일하면서 나는 가끔 한국 어린이들이 재외 동포 어린이에게 쓴 편지를 받는다. 그런데 그 편지들을 읽어 보면 이상하게도 자기 얘기가 없다. 편지 내용은 늘 똑같다. 나라 잘난 척뿐이다. 한국이 얼마나 잘살며, 한국 상품이 얼마나 좋으며, 서울올림픽이 얼마나 성공적이었으며, 좀 있다가 월드컵도 열리며, 그래서 난 자랑스러우니 너도 자랑스러워해라.

왜 아이들은 자기 존재를 잊을 정도로 조국이 자랑스러운 것일까? 왜 이 아이들은 자기와 국가를 구별하지 못할까? 그러고 보니 늘 김일성 배지를 달고 다녔다는 북한 출신 동독 유학생들의 얘기가 생각난다. ‘주체의 조국’에서 온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 그 티를 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혹시 우리 아이들의 거품처럼 부푼 자부심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어디 아이들만의 얘기일까 ?

나라의 상징 남용해 시각 공해만 유발

자동차에 붙은 태극기 스티커에는 ‘다시 뛰자’는 구호가 씌어 있다. 우리가 뜀박질이 늦어서 경제가 파탄이 났던가? 그런데 왜 다시 뛰자는 걸까?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군대 식으로 시키는 대로 뜀박질만 하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자율적 시민이 되어 ‘비판하고 참여하고 생각하며 뛰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판단하는 자율적 시민은 상징 조작이나 이데올로기 조작에 놀아나지 않는다. 소중한 나라의 상징을 남용하여 시각 공해를 유발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일까? 그리고 이런 식의 전근대적 캠페인이 과연 진정으로 애국하는 길일까? 가뜩이나 비가 많았던 올 여름. 한 달을 게릴라성 폭우에 단체로 시달리는 태극기들이 참으로 처량해 보였다.

물론 애국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북괴가 남침했을 때 너무나 분한 나머지 달밤에 학교 운동장에서 목총을 들고 혼자서 씩씩거리며 체조를 했다는 전직 대통령의 얘기를 들으며 우리가 웃는 것은, 그의 타오르는 애국심이 우스워서가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그 독특한 방식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태극기 상징 조작을 보고 쓴웃음을 짓는다고, 이 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애국심을 비웃는 것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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