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만화가 죽은 사회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8.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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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만화, 규제에 치여 ‘뇌사’ 상태… 자본·기획력 없어 애니메이션 홀로서기 불가능
‘만화는 죽었다.’ 지난 7월 ‘우리 만화 발전을 위한 연대 모임’이 주최한 전시회 제목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말은 선언적 의미가 컸다. 지난해 7월1일 발효된 청소년보호법에 의해 출판 만화가 된서리를 맞은 데 대한 자조 섞인 항의였다.

그러나 만화가들의 선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비공식적으로 유통되던 일본 만화가 합법적으로 들어올 채비를 하는 데다, 일본 만화와 맞서 싸워야 할 한국 만화가들에게는 족쇄가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보호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된 강철수·박봉성·김중태 씨 등 스포츠 신문 연재 만화가 11명에 대한 재판이 1년 넘게 진행되고 있으며, 단행본 <천국의 신화>를 출판해 기소되었던 이현세씨도 3개월째 재판을 받고 있다. 게다가 이씨가 한민족 고대사를 100권짜리 만화로 복원하겠다던 <천국의 신화>는 10권도 출판하지 못한 채 출판사와 계약이 파기되고 말았다.

“1~2년 뒤 출판 만화 시장 궤멸할 수도”

만화가들을 ‘죄인 취급’하는 이같은 일보다 더 큰 문제는, 작품을 발표할 창구가 막혀 버렸다는 점이다. 청소년보호법 시행으로 서점에서 만화라는 출판물 자체가 거의 사라졌으며, <투엔티 세븐> 등 성인 만화 잡지도 극심한 자금난으로 폐간되었다. 96년 말과 비교하면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출판 만화 시장의 80% 이상이 와해된 것이다. “단행본 만화를 서점 진열대에 올리기 위해 10년 동안 그렇게 애를 썼는데,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1∼2년 후에는 만화 시장이 완전히 사라질지 모른다”라고 만화가 황미나씨는 말했다.

출판 만화가 ‘규제’ 때문에 끝도 모를 나락으로 추락하는 반면, 만화와 형제지간이라 할 만한 애니메이션은 꾸준하게 ‘진흥’하고 있다. 서울시와 춘천시, 문화관광부가 적게는 70억원, 많게는 백억원을 들여 ‘애니메이션 지원 센터’를 건립하고 있다. 같은 집안 자식인 데도 적자(嫡子)·서자(庶子) 차별보다 더한 대우를 받는 셈이다.

전세계적으로 문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문화 산업의 총아로 각광받는 애니메이션을 진흥하려는 정책이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의 토대는 만화이다. 따라서 만화를 죽인 채 애니메이션만 부흥시키려는 정책은 뿌리를 자르고 꽃을 피우겠다는 발상이나 진배없다. 지원의 선후가 뒤바뀌어 수백억원을 투입하는 진흥책은 사상 누각이 될 가능성이 크다.

10월 초에 출시되어 비디오 대여점 대여 순위 2위(11월 초 으뜸과버금 집계)를 기록한 애니메이션 <누들 누드>는 애니메이션 진흥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이다. 비디오 전용 작품으로 국내에서 처음 제작된 <누들 누드>(양영순 원작·서울무비 제작)는 제작사도 예상치 못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블루 시걸> <아마게돈> 등 흥행에서 참패한 ‘한국형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뿌리 키우기’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기 때문이다.

<누들 누드>는 95년 5월부터 2년 동안 에 연재되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발랄한 상상력으로 성(性)을 묘사해 ‘성인 만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은 <누들 누드>는 큰 호응을 얻으며 지난해 단행본 다섯 권으로 묶여 나왔다. 단행본은 15만여 권이 팔려나갔다. 애니메이션 출발점이 출판 만화여야 하는 까닭

출판 만화 시장에서 검증받은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자, 독자들 사이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대중의 호응을 확인한 서울무비는 내년 여름 <누들 누드> 2편을 발표한 다음 2000년께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캐릭터 산업에까지 사업을 확장할 참이다. <누들 누드>를 포함한 양영순씨의 모든 작품을 담은 CD롬도 출시를 앞두고 있다. <아기 공룡 둘리> 이후 처음으로 출판 만화에서 출발한 ‘성공한 애니메이션’인 셈이다.

애니메이션의 출발점이 출판 만화여야 하는 까닭은, 한국이 지닌 자본과 기획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월트디즈니·드림윅스 등 출판을 거치지 않은 채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미국 제작사들은 한 작품에 7백억원씩 쏟아부을 수 있는 대자본들이다. 미국과 더불어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을 양분한 일본만 하더라도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대가의 작품 외에는 95% 이상의 작품이 반드시 출판 만화 단계를 거친다. 한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슬램 덩크> <드래곤 볼>이 좋은 예다.

출판 만화 단계를 거치면 제작비도 많이 줄일 수 있다. 우선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기획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탄탄한 시나리오가 나와 있는 데다, 캐릭터도 이미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캐릭터는 만화를 통해 이미 대중에게 익숙해 홍보에도 별 부담이 없다. 호흡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등 애니메이션 자체로는 여러 가지 흠을 지닌 <누들 누드>가 단번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원작이 지닌 이같은 힘에서 연유한다.

“출판 만화는 애니메이션·캐릭터 사업 등 줄줄이 이어지는 거대한 산업의 척후병이다. 국내에서 출판 만화가 애니메이션을 거쳐 캐릭터 산업에까지 연결된다면, 수출 못지않은 효과가 있다. 최소한 달러를 들여 외국 캐릭터를 사오는 것은 차단할 수 있다”라고 만화가 김수정씨는 말한다.

만화가 이두호씨(한국만화가협회 회장)에 따르면, 지금처럼 만화가 위기에 처한 적도 드물다. 한국 만화의 간판 스타(이현세)를 기소해 ‘만화의 머리’부터 눌러 버렸을 뿐 아니라, 만화가들의 손발을 묶어 놓고 일본 만화와 경쟁하라고 내몬 꼴이라는 것이다.

“출판 만화를 육성하지 않은 채 아무리 돈을 들여도 애니메이션은 성공할 수 없다. 정책 담당자들이 애니메이션의 뿌리가 출판 만화라는 점을 생각이라도 한번 해주었으면 좋겠다. 입이 아플 정도로 얘기했지만 메아리가 없다”라고 이두호씨는 말했다. 지난 11월3일 한국만화가협회는 ‘한국 만화를 살리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대정부 결의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메아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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