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전으로 복원한 문익환.김남주의 삶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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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김남주 ‘평전’으로 읽는 투쟁과 헌신
문익환(1918~1994)과 김남주(1946~ 1994). 두 사람은 1980년대를 서로 다르게 보냈다. ‘늙은’ 문익환이 최루탄 터지는 거리에서 광야의 외침을 토해내는 동안, ‘젊은’ 김남주는 0.7평 감옥에 앉아 9년2개월18일을 묵언의 시쓰기로 버티었다. 둘은 그렇게 달랐지만, 당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1994년 초, 둘은 한 달 간격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10년. 두 사람을 기억하는 평전이 연이어 출간되어 화제다. <김남주 평전>(강대석 지음, 한얼미디어 펴냄)이 타계 10주기인 2월13일에 맞추어 나왔고, 3월 초에는 <문익환 평전> (김형수 지음, 실천문학 펴냄)이 나온다.

도덕적 우익 자처한 늦깎이 투사

문익환은 1976년 3·1 명동 구국선언 사건을 주동하면서 ‘늦깎이 투사’가 된 이후, 죽을 때까지 18년간 여섯 번이나 감옥에 갇혔다.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성서 번역 책임자였던 문익환이 자신의 말년을 ‘도덕적 우익’으로 자처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올인’해버릴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시인 김형수가 쓴 <문익환 평전>은 이 힘의 근원을 찾아가는 시간 여행기이다.

저자는 문익환이 나고 자란 북간도 명동촌에서 노년기 문익환의 원형질을 발견해낸다. 20세기 초 명동촌에는 유학자·기독교인·민족주의자 들이 한데 모여 신세기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안중근이나 이동녕·이동휘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출입하며 임시 거처로 삼은 곳이 바로 거기다. 그래서 마을에는 늘 ‘애국 결사체’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문익환은 거기서, 나중에 늘 콤플렉스를 느꼈었다고 고백했던 단짝 윤동주와 함께 유·소년기를 보냈다. 윤동주의 시에 자주 나오는 교회가 바로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가 목회하던 곳이다.

문익환은 용정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일본 도쿄신학교로 유학했다. 문목사 가족 또한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고향을 떠났다. 문익환은 일제 말 징병을 피해 만주 봉천(지금의 선양)으로 가서 전도사로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는 광복 이듬해 사회주의를 피해 월남한 아버지를 따라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후 미국 유학 중에 한국전쟁이 터지자 유엔 극동사령부 소속 통역병이 되어 귀국한 그는 휴전협정 때 유엔측 통역으로 일했다. 이때 만난 동료가, 1989년 함께 방북한 정경모씨다. 정씨는 저자 김형수씨와 가진 인터뷰에서, ‘문목사는 결자해지 심정으로 북한에 갔다’고 말했다. 통역병에 불과했지만, 분단의 심부름을 했던 ‘죄값’을 치르는 심정으로 통일운동에 헌신했다는 뜻이다.

전쟁 이후 다시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했던 문익환은, 1955년 귀국해 한신대 교수가 되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그는 연구실만 지키던 성실한 구약 학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랜 벗 장준하가 죽자 그의 가슴 속에서 유·소년기에 이미 배태되었을 의협심이 폭발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을 ‘늦게 세상을 보았다’는 뜻에서 ‘늦봄’이라고 불렀다.

문익환은 늦깎이 투사였지만, 당시 그는 유명한 친구들 덕분에 쉽게 운동권 주류로 떠오를 수 있었다. 강원룡 전택부 안병무 등이 그의 절친한 친구였고, 동생 문동환은 이미 재야의 명망가였다. 김영삼은 아버지 문재린 목사에게 세례받은 인연이 있었고, 김대중은 동생의 오랜 ‘동지’였다. 그런가 하면 부인 박용길의 가장 절친한 벗이 바로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였다. 심지어 정일권을 비롯한 그의 중학 동기 여러 명이 군사 정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의 오지랖은 좌우를 넘나들었다.
문익환에 비한다면, 김남주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의 처지에서 가족은 짐일 뿐이었다. 교련을 거부했다가 광주일고를 중퇴한 그에게는 믿고 의탁할 만한 동문도 변변치 않았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김남주는 오직 순정 하나로 모든 것을 헤쳐 나갔다.

김남주는 대학 시절부터 광주 금남로를 캠퍼스로 여기고 산 혁명가였다. 대학을 마친 그는 그곳에 카프카 서점을 열고, 친구가 미군부대 도서관에서 몰래 가지고 나온 이념 서적을 번역한 다음 후배들에게 뿌렸다.

‘…없어라 많지 않아라/모래알 하나로 적의 성벽에/입히는 상처 그런 일 작은 일에/자기의 모든 것을 던지는 사람은.’ 김남주가 쓴 <모래알 하나로>라는 시의 일부다. 이처럼 김남주가 세상을 헤쳐 가는 방식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가 당시 운동권 전위 조직이었던 ‘남조선 민족 해방 전선’의 말단 전사였다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삶에서 가장 빛나고 강조할 대목이다. 어떤 소영웅주의도 민망스럽게 만들어버리는 압도적 헌신성이야말로 김남주의 무기였다.

두 사람은 생전에 두 번 인연을 맺었다. 첫 번째는 1984년 김남주의 첫 옥중 시집 <진혼가>가 나올 때다. 김남주가 칫솔을 갈아 은박지에 눌러 쓴 옥중 시를 밖으로 내보내자, 친구들은 이를 묶어 시집을 내려 했다. 하지만 위험한 국사범이 쓴 시집에 아무도 발문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문익환이 발문 쓰기를 자청한 뒤에야 김남주의 첫 시집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두 사람은 1988년 12월 김남주가 석방되면서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다. 나이 차이를 넘어선 이들의 우정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김남주가 췌장암에 걸려 죽어가자 문익환은 날마다 문병을 가서, 그가 말년에 배운 ‘기 치료’에 정성을 다했다. 그러다가 1994년 1월17일 문익환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한달 후 김남주가 뒤를 따랐다.

<문익환 평전>은 국내에도 잘 쓴 평전이 나올 수 있다는 모범 답안처럼 보인다. 시인 김형수씨는 지난 5년간 문익환의 발자취를 좇아 북간도 용정 명동촌에서 일본 도쿄를 거쳐 평양에 이르는 길고도 먼 여정을 거쳤다. 9백 쪽에 이르는 두터운 단행본 속에는 김씨가 취재한 문익환의 ‘드라마적인 인생’이 풍성하게 녹아 있다.

<김남주 평전>을 쓴 강대석씨는 젊은 시절 김남주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으나, 도중에 학문을 택해 독일 유학을 떠났다. 대구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인 그는 먼저 간 친구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책을 썼다고 밝혔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 ‘철학적 평전’이라 이르듯, <김남주 평전>은 시인의 삶을 촘촘히 복원하기보다는 친구로서의 인상기에 머무른 느낌이다. 빠른 시일 내에 제대로 쓴 평전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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