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과 함께 신명 오른 늙은 명인들의 춤
  • 진김문성 (국악 평론가) ()
  • 승인 2004.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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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멋지고 신명난 ‘늙은 명인들’의 춤
주 교방 굿거리춤의 명인 김수악이 춤을 추다 말고는 악사들 사이로 가 꽹과리를 잡아들고 신나게 두들기며 상쇠놀음을 시작했다. 공기의 결을 따라 흐르던 그녀의 힘 있는 가락은 커다란 감동을 좌중의 가슴에 툭툭 던지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지금 객석에는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와 계십니다”라는 사회자의 짧은 안내 방송이 나오자 강장관과 김수악과의 인연을 모르던 관중은 이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강장관이 김수악의 애제자임이 뒤이어 소개되자 일순간에 고막을 찢는 듯한 박수 소리가 장내를 메웠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대 뒤편에서 상봉한 사제 간의 대화는 매우 평범했다. 김수악의 첫날 공연을 보지 못했던 강장관은 일상적인 인사말을 내놓았다.

제자 강금실을 대하는 스승도 시종일관 차분했다. 안부 몇 마디 오가고, 사진 몇 컷 찍은 후 대기실로 들어선 두 사제는 나란히 소파에 앉았지만, 스승은 제자에게 좀처럼 애정의 눈길을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장관은 그녀의 고난한 인생 역정을 달래주는 가장 큰 보람으로 마음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제자가 자리를 뜨자 노기생은 낮은 목소리로 슬쩍 칭찬꾸러미를 풀어냈다. “난 강금실이 장관이어서가 아니라 정직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야. 정말 고생도 많이 했고, 내 성격 다 받아주면서도 불평 없이 묵묵하게 버텨내던 그 바른 자세가 맘에 들었던 거야.”

법무부장관이 안 되었다면 강장관은 춤꾼이 되어 명무전 무대에서 굿거리춤을 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1985년 부산에서 판사로 근무하던 시절 침묵하고 인내하고 고요의 세계에 몰입하는 법을 배우려고 강장관은 춤을 시작했다. 그 어려운 춤을 3년 만에 떼자 스승은 강금실에게 판사질 그만두고 같이 춤이나 추자고 권유할 정도였다.

애제자가 무대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김수악의 춤은 전날보다 더 흥겹고, 신나고 강렬했다. 전날 잡지 않았던 꽹과리를 들고 춤을 추자 관객들은 탄성을 지르며 박수로 화답했다. 모진 풍파를 춤으로 다스리는 방법을 알았기에 김수악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바지런히 몸을 놀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진주 명무 김수악의 ‘끼’는 끝나지 않았다. 메인 공연이 끝난 직후 사회자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뒤풀이가 이어졌고 웬만한 자리가 아니고서는 구경하기 힘들다는 천하일품 김수악의 구음이 울려퍼졌다. 이틀에 걸친 <여무(女舞), 허공에 그린 세월> 무대는 김수악의 구음과 함께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지난 2월12, 13일 양일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린 <여무(女舞), 허공에 그린 세월> 공연은 사회자의 말처럼 주연과 관객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 관객도 스타가 되는 그런 무대였다. 이틀에 걸쳐 무대에 오른 강선영 김수악 최희선 장금도 권명화 김금화 한동희 7인의 노명인(老名人)은 누가 누구보다 더 하다, 못 하다를 감히 얘기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그 분야에서는 당대 최고의 명인들이다. 하지만 세월은 그들에게서 젊은 시절의 화용월태(花容月態)를 앗아가버렸다. 그들은 허리 굽은 낙락장송이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일제하 기성(평양)의 김채봉, 경성(서울)의 이화선·이월색·구근화의 입춤은 한 시대를 풍미하며 유성처럼 스러져갔고 한영숙·김숙자 같은 명인이 혜성처럼 나타나 오랜 세월 고단한 삶으로 일관한 민중의 살을 풀어주었으며, 그 뒤를 이어 3남 살풀이의 명인들이 명성을 떨쳤다. 서산의 심화영, 광주의 안채봉, 군산의 장금도, 진주의 김수악, 대구의 권명화. 특히 군산 소화권번 출신 예기 장금도의 동살풀이는 소시적 두둑한 행하(팁)를 주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귀한 춤으로, 천석지기나 만석지기 같은 대부호의 큰 잔치에나 가야 볼 수 있었다.
관객들은 애초부터 화려한 기교를 바라지 않았다. 걸음조차 제대로 떼기 힘들어 하는 그들에게서 20,30대 젊은 무용가들이 꾸며내는 화려한 춤사위를 기대하고 왔다면 그 자체가 그들에 대한 모독이다. 완무 자체가 힘든 나이에 어찌 예쁜 태를 보여줄 수 있겠느냐마는 춤사위 하나하나에 묻어 있는 그 아름다운 흔적이 발견될 때마다 ‘아! 소시적엔 한춤 했겠군’ 하는 감탄사가 연방 터져나오곤 했다.

관객들은 혼신을 다해 뿌리고 덮고 엎고 재고 가르는 노명무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뜻대로 따르지 않는 몸 때문에 실수를 할 양이면 손바닥 뼈마디가 쑤시도록 힘찬 박수를 보냈고, 한 무대 한 무대가 끝날 때마다 존경심은 한 줄기 눈물이 되어 뜨겁게 흘러내렸다.

이 날 공연을 연출했던 사회자의 말이 여전히 귀에 쟁쟁하다. ‘이 분들의 춤은 내 심장에 흠집을 내고 갔다.’ 벅찬 감동을 표현할 그 이상의 말은 없을 것 같다. 관객의 호흡과 바람을 의지하여 한 사위 한 사위 풀어내며 완무하던 그들 노명무의 멋드러진 춤사위가 여전히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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