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여성 네티즌 사로잡은 ''싸이월드''의 마력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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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삼성그룹 홍보실에서는 한 인터넷 사이트의 글 때문에 커다란 소동이 일어났다. 극비 중의 극비로 취급되는 이건희 회장 가족의 사생활이 인터넷에 낱낱이 까발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인은 이회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셋째 딸 이윤형씨(25·이화여대 불문과 4학년)였다. 이씨는 인터넷 커뮤니티 ‘싸이월드’의 미니홈피(약식 홈페이지), ‘이뿌니 윤형이네’에 자신과 가족의 소소한 일상사를 풀어놓고 있었다. 소동이 일자 이씨의 사이트는 자진 폐쇄되었다.

이씨와 같은 대학에 다니는 같은 학년 서주원씨(24·언론정보학부) 역시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중독자이다. 취업 때문에 도서관과 강의실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며 지내지만 서씨 역시 ‘싸이질’(싸이월드 미니홈피를 둘러보는 일)만은 빼먹지 않는다. 서씨는 기말고사 시험을 보기 직전에도 자신의 미니홈피를 확인했다.

요즘 여대생들이 열광하는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단연 탤런트 권상우와 싸이월드 미니홈피다. 책상과 화장실 벽에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주소를 적어 놓은 낙서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갖는 일이 마치 ‘짝퉁’(가짜 상표) 프라다 가방을 하나씩 갖는 것처럼 여대생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다.

이런 싸이증후군은 여대생을 시작으로 20대 중·후반 직장 여성과 여고생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 지난 1월19일, 알프스 리조트 근처의 한 스노보드 대여장에서 나지현씨(27)와 조한나씨(27)는 스노보드를 반납하는 막간의 시간을 이용해 자신들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확인했다. 친구들이 게시판에 남긴 리플(답글)을 확인하고 스키장에서 만난 교회 친구와 미니홈피 주소를 교환했다.

일반인뿐만 아니다. 김희선·소유진 같은 유명 여자 연예인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중독된 ‘싸이폐인’이 되었다. 재벌 딸에서 유명 연예인까지 싸이중독증에 걸려, 말 그대로 싸이월드 앞에는 왕후장상의 딸이 따로 있지 않다.
20대 여성들은 왜 이토록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열광할까? 미니홈피 서비스를 하기 전까지 싸이월드는 그다지 주목되는 사이트가 아니었다. ‘아이러브스쿨’보다 먼저 인터넷 사람 찾기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아이러브스쿨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커뮤니티 기능을 보강해 재기를 노렸지만 이 역시 다음 카페나 프리챌 커뮤니티에 한참 뒤졌다. 그러나 미니홈피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싸이월드는 인기 사이트로 떠올랐다. 싸이월드는 미니홈피 효과로 단숨에 ‘다음’ ‘야후’ ‘네이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이트로 떠올랐다.

미니홈피가 떠오른 이유로는 먼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다양한 트렌드를 반영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미니홈피는 다이어리 모양을 하고 있다. 형형색색의 색연필과 각양각색의 스티커 사진으로 자신의 다이어리처럼 꾸밀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미니홈피는 젊은 여성들의 취향과 딱 들어맞았다.

싸이폐인들은 길거리에서 파는 액세서리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처럼 갖가지 아이템을 사서 자신의 아바타와 미니룸을 꾸민다. 미니홈피에서 아바타와 미니룸을 꾸미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은 자신의 숙련도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미니홈피의 사진첩은 디지털 카메라 열풍을 반영한다. 싸이월드에서는 자기 사진첩에 1천장이 넘는 사진을 올려놓은 싸이폐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신병휘 싸이월드 사업팀장은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여줄 공간이 필요했는데 여기에 미니홈피의 사진첩이 안성맞춤이었다”라고 설명했다.

미니홈피 게시판의 리플 달기 기능은 새로운 사이버 커뮤니케이션의 모습을 보여준다. 네티즌들의 커뮤니케이션은 e메일에서 실시간 메신저로 바뀌었다가 이제 리플 달기 형태로 바뀌고 있다. 핸드폰 문자 메시지와 비슷한 리플 달기 기능을 통해 미니홈피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이 되었다.

1인 미디어, 즉 블로그 기능도 미니홈피가 빠르게 떠오른 이유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미니홈피는 이용자가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효과적인 도구이다. 미디어 기능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것은 미니홈피가 독자적인 ‘스타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싸이월드에서는 매일 미니홈피 스타인 ‘투멤’을 선정해 공지한다. 그런데 투멤 스타는 ‘얼짱’이나 ‘몸짱’이 아니다. 투멤에 선정되는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는 친구 관계인 ‘1촌’이 많아야 한다는 것으로 ‘네트워크짱’이라야 스타가 될 수 있다.

미니홈피가 떠오른 데는 이처럼 트렌드를 반영한 것 외에 트렌드에 대한 반동 현상도 영향을 미쳤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실명화’ 현상이다. 싸이월드 미니홈피는 대부분 실명으로 운영될 뿐만 아니라 사생활이 드러나기 때문에 이중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다.

미니홈피의 실명성은 디시인사이드로 대표되는 인터넷의 익명성 문화와 구별된다. 익명성에 기반을 둔 디시폐인들이 공격적인 남성적 인터넷 문화를 보여준 반면 실명성에 기반을 둔 싸이폐인은 관계 맺기를 지향하는 여성적 인터넷 문화를 보여준다.

미니홈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자신을 꾸미기 위해서는 사이버 화폐인 도토리를 모아야 하는데, 비싼 도토리를 모으려면 관계를 많이 맺어야 한다. 중요한 아이템은 관계를 많이 맺은 사람만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미니홈피가 갖는 여성적 인터넷 문화의 속성은 롤플레잉 게임인 <리니지>와 비교해서도 알 수 있다. 둘 다 가상 사회에서의 관계 맺기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리니지>에서는 지배 종속적인 관계를 맺는 반면 미니홈피에서는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다. 미니홈피는 승자와 패자가 갈리지도 않는다. 모두가 자기 완성을 위해서 뛰기 때문이다.

인터넷 업계에서는 싸이월드를 ‘도토리 농장’이라고 부른다. 사이버 화폐인 도토리를 판매해 수익을 올리기 때문이다. 싸이월드의 도토리 판매 사업은 음란·외설·폭력 없이도 인터넷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인터넷 업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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