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를 익히나, 세계관을 배우나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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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각광받는 <천자문> 이야기/“학습서로보다는 인문 교양서로 읽어야”
“하늘은 그 이치가 깊구 그윽헤서 헤아리기 어려운디, 따는 또 흙이라 누른빛이 나는고여. 물리가 트진즉 이 도리를 알려니와, 이 책의 대읜즉슨 천지현황 이 늑 자 속에 들어 있다 헤두 과언이 아닐 것이니라. 이 늑 자 속에 천지 이치 또한 들어 있음은 물론인즉, 배우구 익혀서 스사로 그 몸을 세울진저.”

소설가 김성동씨(56)는 다섯 살 되던 1951년 정월 초하룻날, 차례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할아버지께 이런 가르침을 들었다. 앞에는 <천자문(千字文)>이 펼쳐져 있었다.

김씨는 아마 정식 한문 교육을 받고 자란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그 뒤 시대가 바뀌고, 교육 정책 또한 수시로 바뀌었다. 한글 전용 세대와 한자 병용 세대가 번갈아 출현했고, 한국인 다수에게 한자(한문)는 영어보다 훨씬 어려운 문자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제 21세기. 다시 한자(한문) 붐이다.

“부생아신(父生我身)이며 모국아신(母鞠我身)이라, 아버지는 날 낳으시고 어머니는 날 기르셨네….”

지난 1월2일 오후 4시,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도립서당’에서는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마당 앞까지 낭랑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문을 열자, 수염과 상투머리에 망건을 쓴 훈장님 앞에 초등학생 30여명이 두 줄로 가지런히 앉아 <사자소학(四字小學)>을 암송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운 한재홍(41)·재근(37)·재훈(33) 씨 삼형제가 2001년부터 문을 연, 수도권에서 보기 드문 전통 서당이다. 요즘은 방학을 맞아 평소보다 2~3배 많은 아이들이 2주 일정으로 입주해 있다. 김명주양(11·분당 상탑초등학교)은 “전통 예절도 배우고 한자 공부도 하기 위해 왔다. 처음에는 고생스러웠으나 지금은 재미있다”라고 제법 의젓한 말투로 말했다.
근년 들어 불고 있는 중국 바람에다가, 최근 경제 5단체가 올해부터 기업체 신입 직원 채용 시험에 한자 과목을 넣기로 결정했다고 밝히자 서점가의 한자 서적 코너는 더욱 북적이고 있다. 학습지 업계에 따르면, 현재 전국의 초등학생 4명 중 1명은 한자 학습지를 공부하고 있다. 초등학생 대상 한자 사교육 시장 규모도 3천억원을 훌쩍 넘어섰다. 2001년부터 국가 공인 자격시험으로 바뀐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위탁받아 시행하는 한 사설 기관의 홈페이지는 ‘수험생’들의 문의로 몸살을 앓고 있다.

최근의 한자 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천자문> 출판 붐이다. 현재 시중 서점에는 ‘천자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유통되고 있는 책이 1백40여종이나 된다. 물론 초보적인 학습서이거나 펜글씨 교본 따위가 대부분이기는 하다. 고리타분한 주해서도 몇몇 섞여 있지만, 앞의 ‘실용 학습서’들에 비하면 눈길이 잘 가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천자문 시장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별종’ 천자문 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름에 나온 <욕망하는 천자문>(김 근 지음, 삼인 펴냄)을 시작으로, 초겨울에는 <김성동 천자문>(김성동 지음, 청년사 펴냄)이 나왔고, 2월에는 <천자문의 세계>(백원담 지음, 문예마당 펴냄)가 출판될 예정이다. 세 책은, 지금까지 쏟아져 나온 천자문 서적들과 달리 중문학자나 한학을 배운 소설가가 쓴 고급 인문 교양서 모습을 하고 있다.

김 근 교수(서강대·중국문화 전공)는 <욕망하는 천자문>에서, 언어와 권력, 욕망과 무의식에 관한 푸코와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 틀을 이용해 <천자문>에 들어 있는 무의식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틀어 보여준다.

<김성동 천자문>은 작가가 다섯 살 때부터 읽은 고전의 독후감이자 그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을 풀어놓은 일종의 에세이다. 김성동씨는 “천자문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사람 사는 세상에 두루 통용되는 율법이다”라고 말했다.

가장 늦게 뛰어든 백원담 교수(성공회대·중문학)는 대학 1학년생들에게 5년째 <천자문>을 강의하고 있다. “<천자문>을 통해 표의 문자에 집약되어 있는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 체계를 보여주겠다”라는 것이 백교수가 <천자문의 세계>를 펴낸 의도다.

그럼 <천자문>은 어떤 책일까.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 무제 때의 문사였던 주흥사(周興嗣)가 하룻밤에 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본은 이미 진시황 때부터 있었던 듯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악명이 높지만, 잘못 알려진 부분도 적지 않다. 당시는 나라마다 한자가 달랐는데, 분서(焚書)의 기준은 책의 내용이 아니라 진나라 문자와 같으냐 다르냐에 따라 정해졌다. 진시황은 문자가 언어보다 사상 통일을 이루는 데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 진시황 때 편찬된 책이 <창힐편>이다. 지금은 원문이 남아있지 않은, 사언고시로 이루어진 이 책이 ‘통일 한자’와 <천자문>의 원형이라고 전해진다. 주흥사는 이런 원형을 토대로 중국의 대표적인 유가 텍스트에서 한자 1천 개를 한 자도 중복됨 없이 뽑아냈다. 그리고 네 글자를 한 구로, 다시 두 구가 한 문장을 이루는 사언고시 형식의 <천자문>을 완성했다.
‘하늘 천 따지 가마솥에 누룽지….’ <천자문> 내용은 몰라도, 이 노래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만큼 <천자문>은 전통적으로 한문 학습서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천자문>이 명성만큼 학습 교재로 애용되어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주 배격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전기의 학자 최세진은 <훈몽자회>를 편찬하면서 “<천자문>에 실린 고사는 내용은 좋으나 너무 어려워서 학동들이 고사의 깊은 의미를 알려 하기보다는 단순히 글자만 익히려 하므로 초학자용 입문서로는 적당하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다산 정약용도 ‘학동들의 공부에 적절치 않은 일시적 희작’이라고 <천자문>을 호되게 비판한 뒤, <아학편(兒學編)>이라는 초학자용 학습서를 직접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천자문> 비판은 그 글의 수준보다는 내용과 관련된 것이다. <천자문>은 거대한 중화사상 체계를 조밀하게 녹여놓은 책이다. 따라서 학동들이 서당에서 무릎 꿇고 앉아 ‘하늘 천 따 지’를 읊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중화적이고 봉건적인 세계관이 스며들 수밖에 없다. 김 근 교수는 “이는 한자의 고립문자적인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한데, 한자 자체가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제의 부속품이자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이다”라고 말한다.

고대 이래로 중국인들은 한자를 단순한 의사 전달 수단만이 아닌 영물(靈物)로 취급했다. 중국인들은 피휘(避諱)라 하여 아버지나 존경하는 사람의 함자를 함부로 부르거나 쓰지 않았다. 말조심을 강조한 경구가 많은 것이나, 최근까지 중국에서 쓰레기통에 ‘경석자지(敬惜字紙, 글자가 적힌 종이를 함부로 버리지 마라)’고 써놓는 것도 한자의 주술적 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은 국내에까지 전해졌다. 대구의 원래 이름은 ‘大丘’였으나, 조선조 때 유생들이 공자의 함자(孔丘)를 함부로 붙일 수 없다고 항의해서 ‘大邱’로 개명한 것은 유명하다.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소중히 모시는 것도 그런 잔재로 볼 수 있다.

한자를 영물로 보는 관점은 ‘참위설(讖緯說)’이나 파자(破字)로 점치는 행위에서 도드라진다. 가장 유명한 파자 이야기는 <삼국지>에 나온다. 동탁의 폭정이 심해지자 시중에는 ‘천리초 하청청 십일복(千里草 何靑靑 十日卜)’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동탁(董卓)의 이름을 파자한 것으로, ‘천리초가 지금은 푸르지만, 열흘을 못가리라’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이처럼 한자를 파자해서 여론을 움직인 사례는 국내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 중종 때 조광조를 실각시킨 ‘주초위왕(走肖爲王:조씨가 왕이 된다) 사건’이 대표적이다.

한자는 또한 사회 통합의 기제로 쓰이기도 했다. 중국 한나라 말기에 유희가 쓴 <석명(釋名)>이라는 책을 보면, 한자가 중국의 사유와 질서 체계를 잡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가 잘 나와 있다. 중국이나 한국의 전통적인 집안에서는 이름을 지을 때도 5행에 따라 항렬과 글자를 택한다. 따라서 이름만 알면 그 사람의 집안 내력뿐 아니라, 심지어는 몇째 아들인지까지도 알 수 있다. 중국이나 한국의 전통 사회에서 이름짓기는 개체화가 아니라 집체화 과정이었던 셈이다.

한자는 또한 표의문자라는 특성답게 글자를 보면 어떤 뜻인지를 대개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맏 백(伯)’ 자는 사람 인(人)과 흰 백(白) 자로 이루어져 있다. 흰 백 자는 엄지손가락 모양이다. 으뜸이라는 뜻이다. 으뜸은 머리가 흰 사람일 경우가 많다. 따라서 늙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이번에는 ‘둥글 륜(侖)’ 자를 놓고 보자. 이 글자는 파이프 여러 개를 묶어 만든 생황이라는 악기를 보고 만든 글자다. 여기에 수레 거(車)를 앞에 붙이면 ‘바퀴 륜(輪)’ 자가 된다. 바퀴 살이 중심을 향해 묶여 있는 형상을 상상하면 된다. 또 여기에 뫼 산(山) 자를 앞에 붙이면 곤륜산을 이르는 륜(崙) 자가 된다. 곤륜산은 여러 봉우리가 빽빽이 모여 있는 형상으로 되어 있는 산이다. 또 여기에 사람 인(人) 자를 붙이면 ‘인륜(人倫)’을 뜻하는 글자가 된다. 고대 중국에서 인륜, 즉 윤리란 사람들이 질서 있게 모여 있는 것을 뜻했다.

이렇게 한자의 ‘관계학’은 나에서 집안, 나라, 천하로 계속 이어진다. <석명>에는 한자 만여 개가 이렇게 촘촘하게 ‘관계’ 속에 묶여 있다. 그리고 <천자문>은 한자의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특성을 집약해 놓은 책이다.
하늘 천 따지…, 혼돈에서 하늘과 땅이 갈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천자문>은, ‘언재호야(焉哉乎也)’라는 허사로 끝난다. 즉 <천자문>은 혼돈에서 시작해서 다시 혼돈의 세계로 돌아가는 순환 구조로 되어 있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 <천자문>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한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형이상학 체계를 배우는 것이다.

“사람이 만든 불완전한 규범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려면 뭔가 안정된 것에 의존해야 했다. 그게 우주다. <천자문>은 태양은 임금, 달은 신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관계에 비추어 지아비와 지어미, 형님과 동생,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한다. 자연히 봉건적인 독재 체제가 정당화된다.” 김 근 교수의 말이다.

그럼 <천자문>을 떼면 한문 실력이 늘고 중국어까지 잘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우선 한자와 중국어는 다르다. 더구나 <천자문>은 요즘 쓰는 백화문이 아니라 고어체 시이기 때문에, 이를 달달 왼다고 한문 문장 학습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김언종 교수(고려대·한문학)는 “초학자들에게 <천자문>을 권하면 한문도 제대로 배울 수 없을 뿐더러 흥미조차 없앨 수 있다. 한문을 배우려면 <동몽선습>이나 <명심보감> 처럼 완전한 문장으로 된 책을 보는 게 나으며, 실용적인 목적으로 중국어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한자가 아니라 중국어를 배우는 게 낫다”라고 말한다.

그럼 21세기에 <천자문>을 읽는다는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천자문>은 학습서로보다는 인문서로 읽어야 한다”라는 백원담 교수의 말에 정답이 있을 듯하다. 제해성 교수(계명대·중문학)도 “문·사·철이 한꺼번에 녹아 있는 <천자문>의 우수성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인문학적 독서를 권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동서와 고금의 담론들이 모두 쏟아져 나와 섞여 있는 현재와 같은 ‘하이브리드 시대’야말로 <천자문>를 가장 객관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적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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