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비옷, 그 느림의 아름다움
  • 成宇濟 기자 ()
  • 승인 2000.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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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옷 장인 김해자씨/개인전 열고‘절제의 미’선보여
1992년 그녀가 난데없이 나타났을 때 전통 옷을 연구하는 이들은 깜짝 놀랐다. 100년 전 명맥이 끊겨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통이 하루아침에 생생하게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전통뿐 아니라 현대적 미감까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연구자들은 환호했다. 특히 누비옷을 ‘한복의 백미’ ‘규방 예술의 극치’라고 평가한 석주선씨(작고·전 단국대부속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관장)는 “네가 큰 일을 냈구나”라며 즐거워했다.

199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으며 ‘누비옷의 살아 있음’을 알렸던 김해자씨(48)가 전시회를 연다. <김해자 침선미(針線美)전>(4월12~18일·공평아트센터·02-733-9512)은 ‘누비옷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두 번째 전시회이다.1996년 전통 바느질 기법인 ‘누비장’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되고 김씨가 기능 보유자로 인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누비는 골동품과 용어로만 남아 있었다. 누비는 천과 천 사이에 솜을 넣고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바느질해야 하는 섬세한 기법이다. 기원전 1000년께부터 고대 이집트와 중국에서 사용된 이 기법은 세계 각처로 번져갔으며, 한반도에서도 고대부터 사용했으리라고 추측된다.

빼어난 실용성과 격조 높은 아름다움으로 조선 시대에까지 전통을 이어 온 누비옷은 100년 전 이 땅에서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서양 문물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재봉틀, 때로 숨도 멈추어가며 오랜 시간 손끝으로 꼼꼼하게 작업해야 하는 ‘전근대적이고 비능률적인 바느질’을 단번에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누비옷 짓기는 수행이다”

불가(佛家)에서 승려의 실용적인 옷이자 수행의 한 도구로서 명맥을 유지하던 누비가 다시 속세에 나온 것은 김해자라는 장인을 통해서였다. 경북 금릉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섬유복장학원에 다니며 한복 재봉을 익힌 그녀는, 우연히 접한 누비에 금방 빠져들었다. “고종황제의 침방 나인이 수덕사 견성암에 출가했었는데, 그 분이 그곳에서 누비로 승복 짓는 법을 가르쳤다. 속세로 나온 그분 제자 가운데 한 분이 나의 스승이다.”

김씨는 누비로 만든 승복에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현대적인 옷으로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감을 잡았노라고 말했다. 20년 전 일이다. 김씨는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 공방을 차리고 연구와 작업에 몰두했으며, 1992년 그 결실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전통 복식 연구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누비라는 전통을 제대로 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누비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새로운 디자인과 자연 염색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김씨에 따르면, 실용적이면서 고급스러운 미감을 드러내는 누비는 과학적이고도 가파른 정신 세계가 담긴 옷이다. 누비옷은 보통 0.3㎝간격으로 바느질하는 까닭에, 아무리 자주 빨아도 처음의 모양이 틀어지는 법이 없다. 게다가 천과 천 사이에 솜을 넣고 바늘로 누비면 땀땀이 공기층이 형성된다. “옷을 딱딱하게 만드는 재봉틀과 달리 바느질 누비는 사람의 손이 천의 앞뒤로 건너가기 때문에 그만큼 부드럽고 몸에 편하다. 사람의 손이 기계보다 훨씬 더 과학적이다.”누비옷이 실용 차원을 넘어 전통의 멋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평가되는 까닭은, 어떤 공예품보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성균관대·단국대·대구대 등에서 강의하고 자기 공방에서 제자를 키우며 누비옷의 1인자로 대접 받는 김씨조차도 남성 두루마기 한 벌을 짓는 데 하루 10시간씩 꼬박 20일을 작업해야 한다.

누비라는 예술품이 지닌 가장 큰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정직함이다. 김씨처럼 아무리 뛰어난 장인이라 하더라도 고단하고 단순한 작업 방식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으며, 그 단순함은 작업하는 이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마련이다. 단순하기 때문에 정직하며, 정직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간직하는 실용적인 옷인 셈이다. 누비옷은 수백년간 땅에 묻혀 있어도 원형을 유지한 채 발굴되는 유일한 옷이다.

김씨는 그 단순한 작업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는 수행을 해왔다고 말했다. “누비는 바늘에 실을 꿰어 꿰매기만 하면 되는 매우 쉬운 일이지만, 이 일은 섬세함과 차분함을 기본으로 해서 흔들리는 마음까지도 붙잡아주는 인욕을 필요로 한다. 혼란한 마음이 가라앉아야 바늘도 제자리를 찾아 자연스럽게 꽂히고 땀수도 정확해진다.”

김씨는 세상 변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느리게 일해야 하는 이같은 일의 중요성을 깨닫는다고 했다. “세상이 너무나 빨리 돌아가는데, 속도를 늦추는 일도 있어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게 아닌가.”

이번 전시회에는 다양한 누비옷 100여 점과 천연 염료로 물들인 천 70여 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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