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가족’ 모델을 보다
  • 노순동 (soon@sisapress.com)
  • 승인 2003.11.1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가 백지순씨의 ‘아시아 모계 사회’ 사진전/모쒀족·에데족 등 풍속 담아
아시아의 모계 사회’라는 주제로 사진전을 열고 있는 백지순씨(36)는 요즘 빗발치는 문의 전화가 어리둥절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사진’에 대한 미학적 접근이라기보다는 신기한 풍습에 대한 호기심인 경우가 많았다. 인류학자가 받아야 할 몫의 질문을 받아든 백씨는 이런 반응이 반갑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하다.

게다가 반응은 성차가 뚜렷했다. 여성들은 대부분 호기심에 눈을 반짝거렸고, 남성들은 짐짓 원시적인 체계라며 무시하거나, 아니면 프리 섹스가 가능한 곳 아니냐며 희화화하곤 했다. 백씨가 아시아의 모계 사회라는 주제에 더욱 전의를 불태운 계기가 있었다. 한 지인이 ‘흠, 모계 사회가 모권 사회는 아니라고’라는 한마디를 찔러넣은 것이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뭘까.

첫 촬영지로 인도네시아 마낭카바우 족을 찾은 것이 1993년. 백씨는 꼭 10년 만에 전시회를 기획했다. 그동안 그녀가 집중 탐사한 아시아의 모계 사회는 중국 모쒀족과 인도네시아 마낭카바우족, 베트남 에데족, 인도 나야르 카스트족이다. 세계적으로 총 84개 부족이 모계 풍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아시아 지역의 풍습은 그다지 정보가 많지 않다. 그녀가 전시회에 맞추어 펴낸 사진집 <아시아의 모계 사회>(가각본 펴냄)가 여느 도록과 달리 취재기가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모계 사회의 모권이 덜 지배적인 까닭은?

백씨가 탐사한 네 곳은, 남성이 결혼을 통해 여성의 가계에 편입되는 모계 사회와 평생 결혼하지 않는 체제가 고루 포함되어 있다. 결혼하지 않는 사회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은 중국 모쒀족이다. 해발 2000m 산 중턱에 자리잡은 그 곳은 풍광 또한 빼어나 방송 카메라가 심심치 않게 찾는 곳이다. 2001년 소설가 이경자씨는 이곳을 다녀온 뒤 <이경자, 모계 사회를 찾다>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모쒀족은 현대적인 의미의 결혼이 없다. 남성이 여성의 집을 찾아 관계를 갖고 아이도 낳지만 그 남성의 생활 공간은 어머니와 누이로 구성된 ‘원래 가족’이다. 남성은 자기 친정에서 외삼촌으로서 여자 조카의 자녀를 돌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는? 당연히 아내의 형제 자매가 보살핀다. 남성은 외삼촌 역할을 잘해내야 ‘좋은 사람’ 대접을 받는다. 이런 현상은 부계 사회에서 여성이 숙모나 형수 노릇을 잘 하도록 요구받는 것을 연상시킨다.

근대적 의미의 결혼 개념이 없으니 한 여성이 아버지가 다른 자녀를 낳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자녀는 한 어머니와 결속되어 있고, 그 자녀를 부양하는 것은 전체 가족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간혹 남성이 나이가 들면 자기 친정이 아니라 자기 자녀가 있는 곳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남성이 벌어들인 재화를 조카에게 주어야 하는지, 자기 아내나 아이들에게 주어야 하는지를 놓고 갈등하는 경우가 있다고 백씨는 귀띔한다.

결혼을 하는 경우, 모계 사회는 신랑이 신부의 가계에 편입된다. 베트남 에데족이 그 예다. 신부측은 돈을 지불하고 신랑을 사온다. 백씨의 카메라에 잡힌 한 여성은 “내가 돈을 내고 널 사왔어”라고 말하고, 이에 남자 친구는 “난 대학생이라 몸값이 비싸”라고 말한다. 결혼식 때 여성이 남성을 잡아 이끌고, 신부측 하객이 주빈 노릇을 하며, 참가하는 숫자도 훨씬 많다.

1990년대 초반 탐사를 시작했을 때 백씨가 품었던 의문은 풀렸을까? 모계 사회의 모권은, 부계 사회의 부권과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백씨는 그것을 불완전한 권력이라기보다는 공존의 지혜로 해석하고 싶어한다.

모권이 부권과 다르다는 백씨의 인식은 과도한 일반화가 아니다. 일찍이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모계 사회가 평화롭다는 것을 ‘사실’로 적시했다. 여성을 혹독하게 지배하는 가부장제는 있지만, 그 반대 양상의 가모장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이런 현상을 여성의 본성 탓으로 신비화하지 않았다. 가부장제와 비슷한 가모장제가 성립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남자들이 무기와 무장한 전투 기술을 독점하고 있어, 남자들을 ‘지배하고, 격하시키고, 착취할’ 수단을 갖지 못하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남성성 결핍 때문이 아니라, 권력 결핍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물론적인 해석이 대수랴. 여성들이 현재 모계 사회에 호기심을 갖는 것은, 남성을 지배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족 제도란 사람이 행복하자고 만든 것일 뿐이라는 상대성을 확인하고 싶어서일 터이니.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