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 휩싸인 세계무역센터 재건 설계안
  • 이종건 ()
  • 승인 2003.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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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역센터 설계안 ‘논란’…“9·11 상징성 반영한 ‘마천루 프로젝트’ 되어야”
일상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사라졌을 때 알게 되는 법이다. 뉴욕의 일상 또한 그렇게 돌연히 속살을 드러냈다. 낙관적인 전망이 새로운 세기를 온통 물들이던 21세기 초입에 터진 9·11 테러는 사람을 겨냥했다기보다 건물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리고 상징이라는 단어가 이미 낡아버린 시대에, 집단의 기억이나 꿈과 이상을 붙들어매는 그런 기념비적인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건물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 숨겨진 단단한 의미를 드러냈다.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무너진 직후 임차권자이자 개발업자인 래리 실버스타인은 더 높고, 더 튼튼하고, 더 아름다운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짓겠다고 공언했다. 뉴욕 시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2001년 10월 초 ‘하부 맨해튼 개발법인’(LMDC)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국제 설계 경기를 거쳐 설계안 6개가 후보로 선정되었다. 2002년 말이면 최종안이 확정될 참이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시민들이 움직인 것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곳곳에서 시민들은 의견을 개진했다. 선정된 안들은, 모두 사무실 면적을 지나치게 많이 잡았고 또한 상상력이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념성이 없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뉴욕을 상상하라’는 제목으로 열린 워크숍에서 그들의 꿈과 이상을 각종 스케치와 글 들을 통해 적극 제안했다. 뉴욕의 한 사설 갤러리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인정받는 건축가들을 초빙해 그들의 상상력을 전시하기도 했다.

맨해튼에 대한 뉴욕 시민들의 뜨거운 애정은 개발업자와 뉴욕 시가 그동안 준비한 것을 백지로 만들었다. 개발권을 쥔 쪽은 결국 프로젝트의 공공성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시민들이 공감하는 작품을 새 설계안으로 선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건축은 본디 거주자를 뛰어넘어서까지 풍경을 만드는, 그래서 모든 이의 삶과 환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공공 행위라는 점을 이 새로운 마천루 프로젝트는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새롭게 바꾸며 등장한 것은 1973년이었다. 모든 것이 표준화하고, 대량 생산 시스템이 맹위를 떨치던 시대였다. 미노루 야마사키는 이런 포디즘의 원리, 즉 그리드(grid)·시리즈 그리고 동일성 반복 같은 원리를 궁극적인 건축 언어로 발전시켰다. 그러면서도 부드러움과 휴머니즘을 놓치지 않았다. 이런 건축 철학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과감하게 실험한 야심작이 세계무역센터 건물이었다. 이후 쌍둥이 건물 형식은 국내의 여의도 LG타워를 비롯해 말레이시아와 일본 등지에서 재현되었다. 튜브 구조(작은 기둥을 바깥쪽에 빽빽하게 둘러세워 외력에 저항하도록 만든 구조체) 또한 마천루 설계의 전범으로 자리잡았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30년 후인 지난 3월7일, 새로운 세계무역센터를 위한 국제설계경기 결과가 발표되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대니얼 리베스킨드의 설계안이 당선작으로 뽑혔다.

리베스킨드 당선작 앞에 난관 첩첩

리베스킨드의 손으로 넘어간 세계무역센터 설계안은 새로운 모습이었다. 이전보다 더 높아진, 그리고 자유의여신상과 형태적으로 구조적 유사성을 띤 좁고 긴 매스는, 무엇보다 새로운 자신감을 고취한다. 붕괴 당시 파인, 허드슨 강물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려고 설치한 흙막이 벽으로 둘러쳐 놓은, 깊고 컴컴한 ‘공허의 공간’을 절대 부재 상태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9·11 테러를 상기하려는 섬세함도 갖추었다. 세계의 정원이라고 이름지은 수직 타워 식물원도 평화를 상징한다. 이 밖에도 새 설계안은 건물 곳곳에 상징성을 강조한 공간을 배치했다.

하지만 설계안이 실제 건물로 이어지기까지는 많은 장애를 넘어야 할 듯하다. 개발권자인 실버스타인이 상업적 타당성을 가진 건물이 들어서야 한다면서 설계자 리베스킨드를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7월 말, 그는 상업 빌딩 전문 건축가인 데이비드 차일즈에게 건축 주도권을 위임하면서 건축 과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10년 후 완공될 새로운 세계무역센터 건물은 현실적인 조건들과 타협하면서 현재의 설계안과 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베스킨드의 말처럼 설계 당시의 개념이 유지될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마치 이전의 쌍둥이 빌딩이 그랬던 것처럼, 이 시대 최고의 테크놀러지가 다시 한번 그곳에서 실험 무대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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