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혹 떼려다 더 큰 혹 붙였다
  • 워싱턴ㆍ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5.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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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이슬람정파 득세로 친미 정권 꿈 멀어져
이라크에서 미국의 앞길이 계속 꼬이고 있다. 지난 1월30일 이라크에서 치러진 총선 결과, 공교롭게도 이웃 이란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유대를 가진 정당들이 최대 정파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핵 개발 의혹을 받고 있는 이란은 미국이 현재 최우선 응징 대상으로 찍은 ‘불량국’이다. 순전히 선거 결과만 놓고 보면 미국이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미국 부시 행정부는 그토록 공들여온 이라크 선거가 비교적 무사히 치러진 데 대해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내심 당혹스런 눈치다. 미국이 이라크 전후 재건 사업과 치안 유지를 위해 지금까지 쏟아 부은 돈은 3천억 달러가 넘는다. 미군은 또 사망자만 1천5백명에 육박할 정도로 피를 흘렸고, 지금 이 순간도 고통스런 대가를 치르고 있다.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그간 꾹 참아온 데는 이라크에 장차 친미ㆍ친이스라엘 정권을 세울 수 있으리라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같은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추가 이번 총선거였다. 적어도 총선 실시 자체만 놓고 보면 이런 꿈의 일부는 이루어진 것 같다. 사담 후세인 치하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수니파가 대거 투표에 불참하기는 했어도, 이번 선거는 전체 유권자 중 8백55만명이 참가해 비교적 높은 58%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또 선거 직전까지 선거를 방해하려는 유혈 폭탄 테러가 잇따랐지만 선거는 이라크 전역 18개 주에서 별 탈 없이 치러졌다.

총선 결과 전체 인구 2천6백만 가운데 대다수 인구를 차지하는 시아파의 정당 연합체인 이라크통합연맹(UIA)과 북부 쿠르드족 연합체인 쿠르드연맹리스트(KAL)가 전체 2백75개 제헌 의석 가운데 각각 1백32석과 70석을 얻어 제1당과 2당으로 등장했다. 후세인 정권 붕괴 후 처음이자 50년 만에 처음으로 실시된 이번 선거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후세인 치하에서 혹독한 탄압을 받아온 쿠르드족이 마침내 주요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한편 이슬람 교리에 충실한 이라크통합연맹이 제1당으로 떠오름에 따라 이라크가 종교 국가로 기울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나아가 소수 수니파가 이번 선거에 대거 불참함으로써 새로 등장할 시아파·쿠르드 연합 정부에 무력 저항을 강화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미국 처지에서 볼 때 골칫거리는 이라크통합연맹과 쿠르드연맹리스트의 지도부 이하 상당수 인사들이 이란과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이라크 내정을 좌지우지할 총리를 배출하게 되어 있는 이라크통합연맹의 경우, 당원 수만명이 후세인 독재 시절 이란에서 망명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시아파의 최대 정신적 지도자인 아야툴라 알리 알 시스타니는 출생지가 이란이고 오랜 활동 근거지 역시 이란이었다. 때문에 그가 원격 조정할 이라크 새 정부가 반미 노선의 기치를 치켜든 이란과 연대하거나 이란식 신정 정치를 꾀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시각이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이라크통합연맹에 이어 제2의 거대 정당으로 탈바꿈한 쿠르드연맹리스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쿠르드족의 공동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새 정부에서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르고 있는 잘랄 탈라바니도 이란과는 오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다만, 쿠르드족은 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 북부 지역에서 미군과 적극 연대해 후세인 병사에 맞섰던 만큼 쿠르드연맹리스트는 적어도 이란과의 관계에서 이라크통합연맹과 다른 노선을 취할 가능성은 있다.

이란과 닮은꼴 국가 될까 전전긍긍

미국 미시간 대학의 중동 문제 전문가인 후안 콜 교수는 “중동의 정치 지형을 따져볼 때 이번 선거 결과는 결코 미국이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라고 논평했다. 중동 문제 전문가인 언론인 라미 쿠리 씨는 “안정적이고 번영적인 친미ㆍ친이스라엘적인 이라크를 건설하겠다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친미·친이스라엘 정권 옹립’을 염두에 두고 이번 선거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정당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부시 대통령이 지난해 국정 연설 당시 부인 로라 옆에 앉도록 배려했을 만큼 공을 들여온 친미 정객 아드난 파차치가 이끄는 정당은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또한 이야드 알라위 현 이라크 총리가 이끄는 이라크리스트(IL)는 고작 35석을 얻는데 그쳐 제 3당으로 밀려났다.

한때 이라크 미군정 고문을 지냈고 현재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래리 다이아몬드 교수는 “이번 선거의 최대 피해자는 알라위나 파차치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다. 제헌의회 의석 중 3분의 2가 이라크통합연맹과 쿠르드리스트 2개 정당에 집중된 것 자체가 우려스런 상황이다”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번 선거 결과가 앞으로 미국의 이라크 및 중동 정책 구상에 미칠 영향이다. 사실 1970년대 이후 역대 미국 행정부는 중동에서 이란과 이라크 어느 한쪽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해 지역 구도를 깨는 것을 원치 않았다. 중동 최대의 맹방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친미 아랍국이 이란·이라크로부터 위협받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내심 이란과 이라크가 견원지간이 되어 서로 으르렁대기를 바랐다. 실제 이란·이라크는 1980년부터 무려 8년간 장기전을 벌였을 만큼 앙숙 관계였다. 그런데 이같은 긴장 관계가 이번 이라크 총선을 계기로 오히려 선린 관계로 변질될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물론 이라크의 새 정부가 이란과 급속히 가까워질 것이라는 관측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이들은 이라크 시아파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앞으로 이라크 내정을 ‘수렴청정’할 것으로 보이는 시스타니가 신정(神政)에 회의적이라는 사실을 꼽는다. 시스타니가 앞으로 새로 제정될 헌법에 이슬람 율법이 반영되기를 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라크가 이란처럼 신정 국가로 나가는 것을 찬성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변수는 이라크에 15만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이 이라크가 이란과 가까워지는 것을 방관하겠느냐는 것이다.

과연 새로 탄생할 이라크가 미국이 원하는 세속적인 친미국으로 탈바꿈할지, 아니면 미국에게는 ‘악몽’이 될 친이란 종교 국가로 전환할지 좀더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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