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더의 1%, 케리도 울리려나
  • 워싱턴·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4.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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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 후보로 미국 대선 또 출마…민주당 표 잠식해 ‘고어의 비극’ 되풀이될 수도
미국 대선일(11월2일)을 코앞에 두고 제3당인 녹색당 후보로 나선 랄프 네이더(70)가 상승세를 타고 있는 존 케리 민주당 후보의 당락을 좌우할 수도 있는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다. 네이더 후보는 2000년 대선 때에도 녹색당 후보로 나서 전국적으로 2.7%를 확보하며 민주당 성향의 표를 잠식해 앨 고어 후보에게 타격을 주었다. 그가 이번에도 같은 당 후보로 나서 케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케리는 재선을 노리고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현재 팽팽한 백중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대선 당시 고어 후보는 경합지였던 플로리다 주와 뉴햄프셔 주에서 이른바 ‘네이더 변수’ 때문에 공화당 부시 후보에게 불과 몇 백표 차로 패했다. 당시 두 곳 중 어느 한 주에서만 승리했더라도 백악관은 고어 차지였다.

현재 상황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10월19일 뉴욕 타임스와 CBS 방송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부시와 케리가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등록 유권자들로부터 똑같이 46%를 얻었다. 네이더까지 가세한 3파전의 경우는 어떨까. 뉴욕 타임스 조사 결과 부시와 케리가 똑같이 45%씩 얻은 반면 네이더는 2%를 얻었다. 그러나 이들 중 ‘실제 투표할 경우’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부시가 47%를 얻은 반면 케리는 45%에 그쳤으며, 나머지 2%를 네이더가 가져간 것으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네이더가 케리의 지지표를 갉아먹는 데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같은 날 워싱턴 포스트 여론조사 결과는 앞서 언급한 경합 지역에서 부시가 케리에 비해 겨우 1% 앞서고 있어 이들 지역에서 네이더가 출마하지 않을 경우 케리가 얼마든지 역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현재 각종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케리와 부시는 부동층이 많은 지역인 콜로라도·플로리다·아이오와·메인·미네소타·네바다·뉴햄프셔·뉴멕시코·위스컨신 등 9개 주에서 오차 범위 내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이 가운데 2000년 대선 당시 네이더는 플로리다·아이오와·네바다 3개 주를 제외한 나머지 주에서 3~5%대의 강력한 지지를 끌어낸 바 있다. 이번 대선에서도 그는 아이오와·위스컨신 주에서 4%, 그리고 콜로라도와 메인 주에서 3%의 지지를 끌어낼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케리측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경합지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는 ‘자격상실’


민주당 선거본부측은 지난 대선 때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전국적으로 1% 지지를 얻고 있는 네이더에게 겉으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부동층이 많은 지역에서 ‘네이더 변수’가 실제 위협으로 떠오르면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나마 최근 대표적 부동층 지역 가운데 하나인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주 법원이 대선 투표용지에서 그의 이름을 빼라고 판결해 케리측을 안도하게 만들었다.

선거인단 21명을 가진 펜실베이니아 주는 부시와 케리 후보가 올해 들어 각각 열다섯 번이나 방문했을 만큼 표 끌어모으기에 심혈을 기울여온 주. 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이 네이더를 찍을 수 없는 만큼 케리가 반사 이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케리측이 기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네이더는 펜실베이니아를 제외하고도 최소 30개 주 이상에서 부시·케리와 나란히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릴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테리 매컬리프 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은 최근 네이더에게 출마를 포기해줄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그러나 네이더는 자신이 케리 표를 잠식한다는 민주당측 주장에 대해 펄펄 뛴다. 오히려 자신의 표는 공화·민주 양당 후보에게 불만을 가진 유권자로부터 고루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당측 주장이 억지는 아니다. 저명한 여론조사 기관인 조그비 사가 지난 3월부터 9월까지 유권자들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네이더가 출마하지 않을 경우 그의 지지자 중 41%가 케리를 찍겠다고 응답했고 부시쪽 지지자는 15%에 불과했다. 민주당측이 네이더의 출마 포기를 유도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반면, 공화당측은 오히려 그의 출마를 적극 독려해온 것도 이같은 연유 때문이다.

노정객 네이더가 이길 가능성이 전무한데도 굳이 출마를 고집하는 까닭은 한마디로 공화·민주 양당 정치 구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이다. 그는 이번 대선뿐 아니라 1992년부터 지속적으로 승산 없는 대선 출마를 결행해왔다. 레바논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법대를 나온 네이더는 원래는 소비자운동가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65년 자동차회사의 차량 안전 장치 실태를 고발한 책을 써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듬해 의회가 차량 내 안전벨트 착용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은 네이더는 환경오염이나 거대 기업의 횡포 등에 맞서 캠페인을 벌여왔다. 1990년대 들어 자신의 주장과 소신을 좀더 널리 알리는 수단으로 대선 후보 출마라는 카드를 선택했다.

네이더는 특히 민주당마저 대기업 횡포에 맞서 노동자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공화당처럼 대기업들의 이해를 챙겨주기에 급급하다며 케리측을 맹공격하고 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전국적으로 수백만에 달하는 민주당 좌파 유권자들에게 네이더의 이런 주장이 먹혀들고 있다.

일부 정치분석가들은 네이더의 ‘약발’을 과대 평가할 필요가 없다고 보기도 한다. 네이더 지지파도 1996년 역시 제3당 후보로 나섰다 고배를 마신 로스 페로 지지파처럼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네이더 지지파나 케리 지지파나 모두 부시가 재선되어서는 안된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있는 만큼, 이번에는 케리 쪽으로 표를 몰아줄 공산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 민주당의 여론조사가인 앤 그린버그는 이번 대선에서 네이더 지지파가 케리 쪽으로 ‘변심’할 가능성에 큰 무게를 두고 있다. 이를테면 지난 대선 때 네이더의 러닝메이트로 나섰던 위노나 라듀크가 ‘케리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반네이더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데이비드 존스의 생각은 다르다. 미국 내 유권자들 가운데 공화·민주 어느 쪽도 자기들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에 ‘네이더 변수’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부시·케리가 치열한 백중세를 보이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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