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은 보고만 있었나?
  •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 ()
  • 승인 2003.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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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포로 3천명 사망·실종 증언한 다큐 영화 <마자르 학살>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해 독일 슈뢰더 정부가 ‘무조건 반대’에서 ‘소극적 지원’으로 입장을 바꿈에 따라 지난해 내내 삐그덕거리던 독·미 관계가 가까스로 정상화 길로 접어들고 있다. 소극적 지원이란, 미군이 유엔 승인 없이 이라크를 공격하는 경우에도 독일 기지를 사용하거나 영공을 통과하는 것을 독일 정부가 막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군은 유럽사령부와 유럽의 주요 병참 기지를 독일에 두고 있어 슈뢰더 정부의 이같은 정책 변화는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양국의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는 악재가 터졌다. 지난해 12월18일, 독일 제1공영방송(ARD)이 방영한 기록 영화 한 편이 화근이었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독일 제1공영방송이 정규 프로그램 편성까지 변경해 이 영화를 방영하겠다고 예고하자 즉각 반박 성명을 냈다. ‘내용이 모두 가짜로 드러난 기록 영화를 독일의 이름 있는 방송국이 방영하는 이유를 알 수 없으며, 이는 독일 좌파 세력이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작전에 먹칠을 하기 위한 책동임이 틀림없다’는 것이 성명의 골자다. 독일 제1공영방송은 이같은 논평에 대해 ‘내용이 과연 허구인지부터 조사하라’고 맞받았다.



미국이 이 영화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 까닭은 우선 영화 제목이 잘 말해준다. 아일랜드 출신 기록 영화 전문 감독 제이미 도란이 만든 이 영화의 원래 이름은 <마자르 학살>. 그런데 독일 제1공영방송은 영화를 방영하면서 <아프간 학살, 미군은 보고만 있었나?>로 바꾸었다.



영화는 2001년 11월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카불로 가는 전략적 고지라고 알려진 아프가니스탄 북부 마자르 이 샤리프에서 사라진 탈레반 포로의 행방을 추적했다. 당시 미군이나 북부동맹군에 투항한 탈레반 포로는 8천여 명. 이들 가운데는 파키스탄 등 외국 출신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미군측 요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진 항복 협상에서 탈레반과 북부동맹은 알 카에다 조직원으로 의심되는 이를 제외한 모든 포로는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거나 유엔 또는 국제 기구에 넘겨 국제법에 따른 석방 절차를 밟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당시 탈레반 포로를 넘겨받은 북부동맹 대표 도스툼(현 카이자르 정권의 국방 차관)은 이 약속을 저버렸다. 포로 가운데 4백70명이 알 카에다 조직원으로 분류되어 현지에서 감금되고 난 후, 나머지 포로 역시 모두 3백km 떨어진 감옥으로 이송된 것이다.





목뼈 부러지고 혀 잘린 포로들



그런데 이 감옥에 도착한 포로는 3천15명이다. 이것은 포로 수송을 맡았던 북부동맹 장교가 영화에서 증언한 숫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4천명이 넘는 포로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영화에서 증인으로 나온 북부동맹 군인과 아프가니스탄 주민에 따르면, 탈레반 포로들은 컨테이너에 갇힌 채 트럭에 실려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꽉 막힌 컨테이너 하나에 2백~3백 명씩 갇혔으니 이송 도중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북부동맹 병사는 지휘관으로부터 컨테이너에 통풍구가 필요하니 총을 쏘아 구멍을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총알이 뚫고 지나간 곳은 컨테이너 아래 부분이다. 이는 통풍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총상을 입거나 즉사한 포로가 많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이 기록 영화에는 또 포로 이송 길목에 있는 주유소에 들렀던 한 택시 운전사가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나 주위를 돌아보니 컨테이너가 3대 있었고 그 안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라고 증언하는 장면도 나온다. 수송 도중 피살되거나 질식해서 죽은 포로들은 컨테이너 하나에 1백~1백50명. 이들은 감옥에서 1백50km 떨어진 사막으로 실려가 매장되었다. 살아 남은 포로 가운데 일부도 사막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트럭 운전사는 “총살 현장에서 미군 30~40명을 보았다”라고 증언했다.



미군은 감옥에 남은 포로들도 가혹하게 다루었다. “어느 포로는 목뼈가 부러졌다. 손가락이나 혀가 잘린 포로도 있고 아무런 이유 없이 끌려나가 구타당하고는 돌아오지 않은 포로도 있었다. 미군들은 재미 삼아 그랬겠지만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포로를 감시했던 북부동맹 병사들은 이렇게 증언하면서, 탈레반이 아닌데 단지 그 지역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생포된 이들도 있었다고 밝혔다.
도란 감독이 각종 증언을 토대로 추정한 행방 불명 포로 수는 약 3천명이다. 도란은 집단 매장된 포로가 이 정도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하고, 미군 작전 지역에서 미군의 묵인이나 허가 없이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묻는다.



<마자르 학살>은 지난 6월 독일 의회와 유럽연합 의회에서 일부 공개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국제 조사 활동에 대비해 학살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려고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둘러 공개했던 것이다. 이같은 조처가 어느 정도 주효해 유럽연합 의원들과 국제사면위원회 등은 ‘마자르 사건’을 국제적으로 조사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컨테이너에서 최소한 천명 사망 확인”



하지만 탈레반 포로들에 대한 집단 매장 사건을 처음으로 확인한 쪽은 대인 지뢰 금지 운동을 펼쳐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국경 없는 의사회’(www.phrusa.org)였다. 그들은 국제 적십자사 카불 지부로부터 집단 매장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2002년 1월부터 세 번에 걸쳐 현지를 조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5월, 유엔측 요원들까지 참여한 마지막 조사에서 사막에 매장된 시체 15구를 발굴했다. 그 중 일부는 사망 원인이 질식사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사단은 현지 주민의 증언을 통해 컨테이너를 이용한 포로 수송 사실도 확인했다. 지난해 8월, 미국 언론 중에서 유일하게 이같은 집단 매장 사건을 특집으로 보도한 〈뉴스 위크〉에 따르면, 당시 유엔은 내부 문서를 통해 ‘집단 매장 사건을 조사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 아프가니스탄 인권단체 대표도 “적어도 포로 천명이 컨테이너에서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그 후 미국·영국·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유엔·국제적십자 등에 조사를 촉구했으나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다만 지난해 9월19일에야 유엔 아프가니스탄 사절단이 마자르 사건을 공식 조사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 역시 국경없는의사회와 도란의 활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도란은 지난해 12월24일 이 기록 영화에 쏟아지는 높은 관심을 반영하는 사실 한 가지를 〈시사저널〉에 전해왔다. 지금까지 열두 나라에서 <마자르 학살〉 필름을 구입했고 현재 열다섯 나라 방송사와 판권을 협상 중이라는 것이다. 도란은 또 머지 않아 미국을 비롯해 50여 나라가 이 영화를 상영하리라고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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