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중앙아시아가 수상해"
  •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dwj@e-sisa.co.kr)
  • 승인 2001.10.2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옛 형제국들 미국과 손잡고 '배반' 조짐…
카스피해 놓칠까 노심초사
테러와의 전쟁과 함께 체첸 진압 명분도 얻고 실익을 많이 챙길 것으로 기대했던 크렘린이 요즘 냉가슴을 앓고 있다. 옛 형제국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크렘린을 냉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워싱턴에 협조를 아끼지 않은 이들 나라는 자국의 이해를 꼼꼼히 계산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크렘린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며 소연방 붕괴와 함께 상실한 독립국가연합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오는 10∼11월 카스피 해 인접 5개국 정상회의에서 논의할 경계선 확정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기대했던 듯하다.


그러나 크렘린의 전략은 우크라이나의 미사일에 투폴례프(TU-154) 민항기가 격추되면서 차질을 빚었다. 그리고 체첸 총공격 작전을 눈앞에 두고 그루지야가 딴죽을 걸었다. 지금까지 체첸을 전방위 완충지대로 삼아 러시아의 압력을 피해온 그루지야가 체첸 반군 괴멸을 앞두고 워싱턴과 크렘린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 헬기장을 제공하고, 발 빠르게 워싱턴을 방문해 외교 기반을 마련한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그루지야 대통령은 10년간 충돌을 빚어온 압하지야와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러시아의 남 카프카스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그루지야와 압하지야의 갈등은 미국과 영국이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감행한 10월8일 시작되었다. 유엔 국제감시단을 태운 Mi8 헬리콥터가 압하지야 국경 코도르 계곡에서 격추된 직후, 그루지야와 체첸 반군으로 보이는 게릴라들이 압하지야 마을을 습격해 민간인을 살해했다. 이 돌발 사건이 양국간 긴장을 고조시켰다. 모스크바는 그루지야 내 체첸 반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사고의 책임이 그루지야에 있다고 비난했다. 그루지야 당국은 혐의 사실을 부인하며 크렘린이 체첸 반군을 진압하려고 그루지야를 침공할 구실을 찾고 있다고 맞섰다.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셰바르드나제는 지난 10월11일 푸틴을 소비에트 정권의 유산인 '제국주의 습성'을 계승한 정치인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만일 크렘린이 압하지야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는다면, 평화유지군을 나토군이나 유엔군으로 대치할 수도 있다"라고 크렘린을 위협했다. 한편 워싱턴 외교대표부는 그루지야의 독립과 영토 주권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언론들은 셰바르드나제가 미국을 방문한 이후에 압하지야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간 긴장이 고조되는 점에 주목해 워싱턴이 보증 수표를 제시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사실 중앙아시아의 군사기지를 미국에 제공하는 문제를 놓고 크렘린 수뇌부는 열띤 논쟁을 벌였었다. 격론 끝에 미군 주둔을 허용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상황은 우려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


"중앙아시아, 제2 발칸 될 수도"




세계문제연구소 소장 미하일 델랴긴은 "미국과 유럽이 경쟁하는 중앙아시아에서도 유고슬라비아와 유사한 불안한 이슬람 지대가 형성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발칸 시나리오는 중앙아시아에서도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 경제적 빈곤과 인종적·종교적 충돌 잠재성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각국 정부를 위협해 중앙아시아를 '증기탕'으로 만들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경제적 빈곤과 종교적 억압이 오랫동안 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이슬람의 위협이 시민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주장하며, 이슬람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해 왔다. 인권단체들은 카리모프 정권이 예배는 물론 턱수염을 기르는 것도, 차도르를 두르는 것도 금지할 정도로 이슬람인들을 박해하고 있다고 지적해 왔다.


10월4일 미국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해 테러 전쟁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미군은 '북부 기지'를 사용하게 되었고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 되었다. 10월5일 우즈베키스탄이 미국에 공군기지 사용을 허용한다고 공식 발표한 바로 이틀 후, 탈레반은 즉각 우즈베키스탄에 전쟁을 선포했다. 몇몇 언론은 탈레반이 160km에 달하는 우즈베키스탄 국경지대에 8천 병력을 배치해 전투 준비를 끝냈다고 전했다. 인터넷 통신 RIA 노보스티닷루는 10월13일 우즈베키스탄이 안전과 영토 주권에 대한 직접적 위협에 대비해 미국과 만반의 대책을 협의할 예정이라고 밝혀 충돌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럼스펠드의 타슈켄트 방문은 양국의 거래가 이미 성사되었음을 알리는 계기였다. 전문가들은 우즈베키스탄이 두 가지를 제안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파키스탄과 마찬가지로 외채를 탕감해 주고 경제 원조를 해줄 것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우즈베키스탄이슬람운동(IMU)과 같은 국내 정적을 제거하는 데 협력해 달라는 것이다. 또한 우즈베키스탄은 반 테러 전쟁의 전위대가 되어 전통적 시어머니인 러시아와 '상하이 5'를 결성한 새 시어머니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크렘린은 워싱턴을 중앙아시아에서 조용하게 퇴진시키려고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을 지원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북부동맹과 탈레반이 치르는 내전으로 전환하고 북부동맹이 승리하도록 원조하는 것이 중앙아시아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크렘린은 계산한 것이다. 러시아 일간지 〈이즈베스티야〉(10월11일자)는, '푸틴은 곧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환심을 사려고 미국과 경쟁하게 될 것이다. 미국에 앞서 러시아가 이들 국가에 군사 원조를 늘리는 방법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라고 크렘린에 주문했다. 이미 집권당인 에딘스트보(통일당)는 전쟁지원 특별 방위비 100억 루블(3천4백만 달러) 안을 두마(하원)에 상정했다. 또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우랄군단을 카자흐스탄 남방 경계선으로 배치하고 중앙아시아에서 돌발하는 사태에 신속히 대처할 태세를 갖추었다.


러시아는 탈레반 정권이 붕괴한 후 중앙아시아가 혼란에 빠질 가능성에 대비해 키르기스탄에 대테러 센터를 설립할 예정이다. 탈레반 붕괴는 중국의 신장·위구르 지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과 러시아의 북 카프카스 지역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마약을 대량 유입시켜 유럽의 안정을 해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유라시아 대륙의 자원 보고인 카스피 해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샅바 싸움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불꽃과 함께 점차 격해지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