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잠' 깬 동유럽, 경제 성장 기지개
  • 런던·韓准燁 편집위원 ()
  • 승인 1995.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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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부흥개발은행 분석/폴란드 등 10여 국, 수출 증가·인플레 진정 등 경기 회복 급진전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정치·경제 영향권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해 왔던 동유럽 국가들이 사회주의의 낡은 외투를 벗어버린 지 5년 만에, 이 지역 스물다섯 나라의 각종 경제 지표가 처음으로 회복·성장·안정을 향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11월1일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이 발표한 <체제전환 보고서>에서 밝혀졌다.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유럽부흥개발은행은 당초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이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돕기 위해 설립된 은행이다. 이 은행은 91년부터 동유럽 경제를 분석하여 각종 경제 개혁 조처와 지원 방안을 논의해 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옛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로 이루어진 독립국가연합(CIS)에 소속된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이 역동적인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게다가 앞으로 상당 기간 5~6%의 높은 성장을 계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옛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이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해 정착하는 것을 지원·고무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유럽부흥개발은행이 이들 국가의 경제 상황을 애써 낙관적으로 진단·전망할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은행의 주요 정책 결정에 핵심 역할을 맡고 있는 영국·프랑스 등 서방 국가의 주요 언론들 역시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이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를 포기한 뒤에 겪은 체제 전환의 후유증으로부터 상당 정도 벗어났다는 데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초기 동유럽 경제, 불안·침체의 늪서 허우적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수출 붐, 물가 진정 등 이들 언론의 긍정적인 보도는 지난날 ‘아시아의 네 마리 용’에 쏟아졌던 찬사를 방불케 한다. 보고서 집필의 수석 책임자인 경제학자 니콜라스 스턴 박사는 특히 폴란드·헝가리 등 중부 유럽 국가들이 빠른 경기 회복을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이같은 평가는 동유럽 각국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보면 쉽게 확인된다. 폴란드·체코·헝가리 등 동유럽 10국과 발틱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올해 평균 국내총생산 증가율은 3.8%인데, 내년에는 4.4%로 증가할 전망이다. 그리고 러시아를 포함한 독립국가연합(CIS) 12국도 올해에는 평균 성장률 ―3.4%를 기록했지만, 내년에는 대부분 성장 궤도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에서 자본주의 경제로 체제 전환을 경험한 스물다섯 나라 중에서 올해 평균 성장률이 가장 높은 나라는 알바니아·에스토니아·폴란드·슬로베니아이다. 이들은 평균 6%대의 국내총생산 증가율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내년에는 옛 소련의 일원인 아르메니아와 키르기스 공화국이 8%대로 가장 높고, 몰다비아(7%)와 알바니아·에스토니아(6%)가 그 뒤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아제르바이잔과 체코 등 여섯 나라가 5%대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89~90년 동유럽 국가들의 대변혁 후유증을 고려하면 놀라운 변화임이 분명하다. 이 무렵 동유럽 국가들은 치솟는 물가로 말미암아 정치·경제 불안과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특히 옛 소련의 일원인 아르메니아가 가장 심한 몸살을 앓았다. 인종 분규까지 겹친 아르메니아는 가격 자유화·토지 사유화·세제 개혁 같은 개혁 조처가 초기 단계에서부터 제동이 걸렸다. 따라서 91년 25% 선이던 인플레율이 92년 1,341%, 93년 10,996%로 뛰어올랐다. 러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91년 144%에서 92년에는 2,318%로 껑충 뛰었다. 그런데 체제 변혁 5~6년 만에 이 지역 국가들이 혼란과 침체의 터널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 투자 유치가 필수 조건

하지만 동유럽 스물다섯 나라 가운데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기 이전인 89년의 1인당 국내총생산 수준을 넘어선 나라는 아직 한 나라도 없다. 대변혁의 충격에서 가장 빨리 벗어나 안정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폴란드의 올해 1인당 국내총생산 수준은 89년 수준의 97%이다. 그 뒤를 슬로베니아(94%), 헝가리 (86%), 체코(85%)가 따르고 있다.

옛 소련 공화국들의 상태는 더욱 심각하다. 이들 국가의 국내총생산 회복 수준은 아예 바닥을 맴돌고 있다. 오는 12월 총선과 내년 6월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동요를 겪고 있는 러시아는 비록 경제가 상승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국내총생산 규모는 89년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49% 선에 머무르고 있다. 그리고 내란이 계속되고 있는 그루지야는 산업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해서 실질 국내총생산 규모가 89년 수준의 17% 선으로,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유럽부흥개발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 경제 연구기관들이 동유럽 지역 경제의 회복 가능성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은, 대부분 국가에서 안정 성장의 최대 적인 인플레이션이 억제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2~3년 전만 해도 수천 %에 이르던 물가 상승률이 올해는 두 자리 숫자로 줄어들었다. 가장 안정된 물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되는 국가는 크로아티아(3%)와 알바니아(5%)이다. 또 10% 정도의 물가 인상률을 유지할 것으로 관측되는 나라는 체코·마케도니아·슬로바크 공화국·슬로베니아 등 네 나라이다. 하지만 러시아를 포한한 일곱 나라는 아직도 100~2,500%까지 높은 인플레율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유럽부흥개발은행은 국내총생산 증가와 인플레 억제 외에도, 국내외 자본에 의한 투자 확대, 국영 기업의 민간 기업 전환, 가격과 무역·외환 시장의 자유화, 각종 재정·금융 기구 설립과 경제 개혁의 법적 보장책 마련 등을 동유럽 경제성장의 청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동유럽 각국의 이같은 조처들은 시행 착오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진전돼 왔다.

동유럽 국가들 가운데서 민간 기업체의 총생산량이 국내총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국가는 여덟에 불과하다. 하지만 민간 기업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 가운데 체코의 기업 민영화가 가장 앞서 있다. 이 나라의 국내총생산에서 민영 기업체가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70%에 이르고 있다.

유럽부흥개발은행 보고서는, 지난 5년 동안의 각종 개혁과 이를 위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 유치가 필수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이 유치한 외국의 직접 투자 총액은 57억달러밖에 안 된다. 이것은 말레이시아 한 나라의 외자 도입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다. 유럽부흥개발은행은 중소기업에 대한 투자는 먼저 국내 저축에 의해 충당돼야 한다고 주문하고, 내년부터는 외국인 투자가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한다.

북한 경제 소생에 타산지석 될 수도

현재 초보 단계에 있는 동유럽 은행과 증권·보험 시장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중앙 통제 경제 구조의 잔재를 하루속히 청산해야 한다. 경제 체제 변혁은 정치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스턴 박사는 시장경제 체제로 신속히 전환하는 것은 이 지역 국가들의 민주화를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시장경제 체제 도입 노력이 장기화하면 자칫 권위주의적인 개발 독재 국가가 출현할 우려도 있지만, 지난 5년 동안 동유럽 지역에서 개혁 흐름을 역류시킬 만한 반동 세력은 아직 없다.

유럽부흥개발은행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경제연구소들은 동유럽 지역 주민들이 서방 세계와 비슷한 정도의 생활 수준을 향유하는 일이 그리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전망한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 신흥공업국가들이 이미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있음을 예로 든 이들 경제 보고서는, 특히 홍콩이 1인당 국내총생산에서 영국을 능가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이 서방 선진국 경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민주화와 개방·개혁의 토대를 확고하게 정착시키고 앞으로 10년 동안 두 자리 숫자의 경제성장을 꾸준히 이룩해 나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유럽부흥개발은행에 파견돼 있는 재정경제원 노훈건 국장은 “유럽부흥개발은행이 채택한 동유럽 경제 분석과 전망은 한국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동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은 폐쇄적인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유지해 왔다. 따라서 북한이 경제 개방 정책으로 전환할 경우 동유럽 국가들의 체제 전환 경험이 좋은 선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부흥개발은행이 수행하고 있는 국제 기금에 의한 자본·금융 지원과 기술 협력, 금융회사에 의한 창업 투자 지원 등 동유럽에 대한 경제 지원과, 이의 이론적 토대가 되고 있는 전환 경제학의 성과가 북한 경제를 소생시킬 처방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유럽부흥개발은행에서 그가 얻은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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