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진출의 암초 ‘적성국교역법’
  • 이재훈 (LA국제경영연구원 수석연구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6.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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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내법이 세계 기업 통제…치외법권적 경제 제재 가능, 최근엔 국가보다 기업 대상
 
미·북한 관계의 저변에는 미국 기업의 북한 진출이라는 경제적 이해가 깔려 있지만, 미국의 적성국교역법이 법적 장애로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 기업 진출과 법적 제한의 함수 관계에 대해 현재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북 투자 자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재훈 박사의 기고를 싣는다.<편집자>

미국의 적성국교역법은 대단히 엄격하다. 이 법에 의한 경제 제재는 충분한 사전 경고 없이 행해질 수 있고, 치외법권적인 법역(法域)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수출입 업자에게 귀속된다. 한국 기업의 경우에도 앞으로 미국을 통한 대북 거래가 이루어질 경우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점검 사항에 해당한다.

적성국교역법에 근거한 해외자산 통제 규정은 제재 대상 국가가 원산지인 상품을 수입하는 것은 물론, 미국을 원산지로 하는 상품 기술 및 서비스 직접 판매를 비롯하여 제3국으로 일단 수출된 상품 기술 및 서비스를 제재 국가나 그 국민, 또는 그에 준하는 특별 지정 국민(SDN·Specially Designated Nationals. 미국 재무부는 제재 대상 국가를 위하여 그 국가의 밖에서 일하는 개인 또는 단체를 이렇게 구분한다)에 재판매하는 것 역시 금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스위스·독일 등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조선보험회사’가 그 일례이다. 이 회사는 재무부의 해외자산통제국이 명시하고 있는 특별 지정 국민에 해당한다. 따라서 미국 기업과 조선보험회사와의 거래는 적성국교역법의 범주에서는 완전한 범죄 행위로 분류된다. 한 가지 더 알아두어야 할 것은, 조선보험회사가 SDN인지 모르고 거래했다는 것만으로는 민사·형사 상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법규를 인지하고 있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처벌의 경중만이 달라질 뿐이다.

현재로서는 북한 진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미국 기업들의 로비 활동 역시 이 법을 변화시킬 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고, 또한 많은 사람이 이 법에 의한 경제 제재가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적성국교역법 어기면 징역 10~12년

 
이 법규상 현재 북한과의 교역에서는 서적·잡지·필름·CD·CD-ROM·미술품·뉴스 전송 등 정보 관련 상품을 제외한 모든 상품 기술 및 서비스는 상무부 수출행정국의 사전 허가가 있어야만 수출이 가능하다. 다만 경수로 사업에 관련된 설계 기초공사 비핵 부품은 재무부의 사전 면허를 통해 수출이 가능하다. 그렇다 해도 대단히 제한적인 범주만을 허가하고 있을 뿐이다.

정보 관련 물품과, 금액으로 따져 백달러까지의 물품은 개인 휴대품에 한해 반입할 수 있다. 또한 북한을 여행할 때 구입한 물품은 영수증을 첨부하여 미국 입국 때 세관에 제출해야 한다. 다만 북한산 마그네사이트나 마그네시아는 해외자산통제국의 특별 면허를 받으면 수입할 수 있다.

적성국교역법은 북한을 제재할 수 있는 미국의 주요 법률 근거로 활용된다. 무역 투자 정책을 국가 안보 관점에서 바라보는 클린턴 행정부의 입장이 이 법에서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적성국교역법은 국가 비상 사태 때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의 일부로 인정된다. 적성국교역법은 1917년 10월6일 의회의 인준을 거쳐 법령으로 공포되었다. 법령 제정 당시 이 법은 미국과 전쟁 상태인 나라나 그 귀속지, 점령 지역, 그리고 그 동맹국의 영토에 거주하고 있는 개인 또는 기업과의 교역을 그 개인 또는 기업의 국적을 불문하고 전면 금하는 것을 주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후 이 법은 두 차례 세계대전이 끝나 국가 비상 사태 상황이 종료되었어도 그 모양새를 조금씩 달리했을 뿐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77년에 제정된 국제비상경제권법과 함께 대통령이 특정 국가에 대해 외교적 목표 달성을 쉽게 하기 위한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 예컨대 국가 비상 사태와 무관한 88년 파나마 사태와 93년 아이티 사태 때에도 이 법에 근거한 경제 제재가 발동되어, 외교적 압력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적성국교역법은 미국 또는 해외에 거주하는 미국민과 영주권자는 물론 미국 영토에 거주하는 개인과 기업(지사·자회사) 등 모두에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위반하면 사안에 따라 건당 10∼12년 금고형과 개인의 경우 만∼25만달러, 기업의 경우는 5만∼백만달러 벌금, 또는 두 가지를 병행하여 부과할 수 있다. 수출 또는 재수출 때 이 법을 어기면 수출 통제에 관한 상무부의 처벌이 병과된다.

적성국교역법이 적용하는 대상국은 현재 쿠바·이라크·이란·리비아·북한·UNITA(앙골라)·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이다. 북한은 50년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뛰어든 때를 기점으로 당시 트루만 대통령이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한 이래 이 법규의 제재 대상 국가가 되었다. 현재 북한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내 자산 1천4백만달러가 미국 은행에 동결되어 있음은 물론, 북한과의 모든 수출과 수입이 금지되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적성국교역법에 의한 경제 제재는 재무부 산하 해외자산통제국과 상무부 산하 수출행정국이 관할하고 있다. 이 기관들은 제재 대상국과 교역할 때 특별 허가를 하는 것으로 경제 제재 정책을 통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미국은 거의 모든 물품에 대해 수출·수입에 관한 일반 면허(General Licenses)를 발급하나, 그 면허라는 것이 실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수출행정국이 지정한 특정 물품이나 기술에 대해서는 수출할 때 수출 면허(Specific Licenses)가 요구되고, 수입할 때는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 해외자산통제국은 민사상의 처벌을 부과할 수 있으며 형사상의 처벌은 법무부로 이관한다.

이 법은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이 주어져 있고, 법의 저촉 범위가 너무 넓고, 여러 행정 기관이 관련되어 있어 결정의 지연, 행정기관 사이의 이견 등으로 인해 해외 시장에서 미국 기업의 경쟁력이 일본·유럽 기업에 비해 많이 떨어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법을 지키려는 미국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며, 최근에는 국가보다 특정 기업을 제재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 제재 효과가 더욱 크게 나타나고 있다.

대북 제재 규정 완화 가능성

엄격한 경제 제재 규정 아래서도 미국 기업은 북한 시장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GM·크라이슬러·AT&T·MCI·스탠턴 그룹이 이미 타당성 조사를 끝냈으며, 평양과 워싱턴 간의 정치 관계 변화를 주시하고 있는 상태이다. 올해 초부터 증폭되고 있는 상주 연락사무소 개설 가능성, 경수로 협상 완전 타결 같은 요인들은 북한 시장 진출에 청신호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미국이 적성국교역법에 의한 투자 및 무역 제한 조처를 풀게 된다면 북한에 대한 투자는 다른 서방 국가로부터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의 입장은 미국의 규제가 해제되면 일본과의 수교 및 대일청구권 교섭도 재개하고, 청구권 교섭을 통한 원조로 북한 경제를 재건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다. 그 첫 매듭이 북한 제재 완화이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적성국교역법 완화 문제이다.

국제 금융기구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북한 재정 상태로는 아시아개발은행·세계은행 가입이 극히 난망하다. 그러나 적성국교역법이 완화되면 바로 미국이나 다른 국가로부터의 지원이 보증된다.

최근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구호를 기존 제재 범주에서 제외하고 있고, 앞으로 미·북한간 정치 관계 발전에 따라 기존 제재 규정도 완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재 미·북한 관계의 추이를 살펴볼 때 앞으로 북한에 대한 제재 규정이 극적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베트남의 경우나, 71년 이래 제재 대상국에서 벗어나 매년 무역 최혜국의 위치를 갱신해 가고 있는 중국의 경우를 볼 때 그와 같은 가능성은 더욱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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