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교포 분노케 한 유학생의 죽음
  • 런던·韓準燁 편집위원 ()
  • 승인 1998.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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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씨 타살 사건, 인종 차별 ‘정황 증거’ 뚜렷…‘한인 권익옹호기구’ 결성 움직임
흑인 청년들에게 집단 폭행당해 숨진 한 유학생의 비극적 죽음이, 최근 영국의 한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 주고 있다. 강력 범죄 발생률이 낮은 영국 사회에서, 그것도 가장 치안 유지가 잘 되어 있다는 동남부 서레이 주 한인 밀집 거주 지역에서 한국인이 살해되자 영국인들도 사건의 파장과 후유증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지난 8월15일.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저녁 9시15분께 영국의 코리아타운이라고 불리는 서레이 주 뉴 몰든에 인접한 킹스턴 시의 테임스 강변 산책길. 이날 유학생 이승준씨(31·케임브리지 대학 사회정책학 박사 과정)는 부인 양난주씨(30), 여동생 등 한국에서 방문한 친지 3명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강변길을 산책하고 있었다.

사건 발생 3시간 뒤 응급 조처

사건의 발단은 20대로 보이는 흑인 4명 가운데 1명이 빈 유모차로 뒤쪽에서 양씨를 들이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갑자기 무방비 상태에서 충격을 받은 양씨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이러느냐? 사과하라”는 양씨의 첫 반응에 이들은 “내 유모차를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라며 야유와 함께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화가 난 이씨가 “여기를 떠나라”고 말하는 순간, 유모차로 들이받았던 문제의 흑인이 주먹으로 이씨의 얼굴을 가격했고, 이씨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아스팔트 도로에 쓰러졌다.

쓰러진 이승준씨가 이미 눈을 감고 거친 숨소리를 내며 실신 상태에 들어섰는데도, 그 흑인은 다시 발로 이씨의 몸을 찼다. 이 과정에서 이씨를 보호하기 위해 감싸고 엎드린 양씨와 이씨의 여동생에게도 그는 무차별로 발길질했다. 앞서 가던 이씨의 친구와 양씨의 친구가 뒤돌아서 넘어진 이씨 등을 방어하려 하자, 나머지 흑인 3명이 합세해 집단 폭행을 가하면서, 들고 있던 컵의 액체를 마구 뿌려댔다. 이들은 “남편이 죽어 간다”라고 양씨가 고함치자 도주했다.

이승준씨는 양씨의 전화 신고를 받고 30분 만에 출동한 경찰과 구급 요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첫 응급 조처는 사고 발생 3시간 만에야 취해졌다. 새벽녘에 전문 병원으로 옮겨진 이씨는 두 차례 뇌수술을 받았으나 사건 발생 닷새 만인 지난 8월20일 숨졌다.

경찰이 발표한 사인은 두개골 골절에 의한 뇌손상. 겉으로 보면 이번 사건은 흑인 청년들의 집단 폭행, 그로 인한 두개골 골절, 뇌압 이상과 뇌출혈 후유증, 두 번의 뇌수술, 그리고 뇌사에 의한 사망으로 이어진다. 범인들이 살인의 고의를 1차적으로 부정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행위라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으면 자칫 범인들 주장대로 폭행 치사로 일단락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흑인 청년들은 피해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증오와 격정에 휘말린 집단적 폭력성을 드러냈다. 게다가 부인 양씨 등 유가족은, 초기 대응 과정에 경찰 및 구급 요원들의 비상식·비인도적 행위가 개입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현지에 출동했던 경찰 관계자들에 대한 내부 징계 요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살인을 둘러싼 검찰과 범인측 변호사 간의 법률적 공방은 물론, 내부 징계를 모면하려는 경찰측의 자기 방어 절차까지 진행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최종 확정 판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범인들이 이미 자수했거나 검거되었기 때문에 지난 8월27일부터 예심이 진행 중이다. 1심 재판에서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 그리고 관련 경찰 및 구급 요원이 직무를 수행한 과정에서 인종 차별적 직무 태만이 드러날지에 따라 이씨의 죽음은 한인 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영국내 한국유학생회는 이 사건을 영국의 한인 사회 전체가 당한 공동의 비극으로 간주해, 한인회와 영국 주재 한국대사관의 대처 방안을 예의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 있었던 부인 양난주씨 진술에 따르면, 사건 발생 30분 만에 출동한 구급 요원과 경찰 들은 양씨가 흑인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다고 거듭 진술했는데도 이씨가 술에 취했다고 어거지 발언을 했다. 또 구급 요원들은 구급용 들것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이씨의 머리와 다리를 들어 구급차에 옮겼다. 이때 이씨가 구토하자 한 구급 요원이 이를 피하기 위해 머리를 놓는 바람에 머리 부분이 의자 시트에 그대로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시트에 머리가 부딪혀 이씨의 상태가 얼마나 더 악화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구급 요원 가운데 한 사람은 양씨에게 세탁비를 받아야겠다는 발언까지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더구나 상처를 입은 양씨가 보호자로서 이씨와 함께 병원행 경찰차에 동승하기를 요청했으나, 담당 경찰은 따로 오라며 거절했다. 양씨에 따르면, 그후 거리에서 신호 대기 중인 다른 순찰 경찰차를 발견해 병원 수송을 긴급 요청했지만 그 요청도 거절당했다.

이같은 경찰 행동은 일부 경찰 관계자들의 유색 인종에 대한 편견을 엿보게 한다. 이와 관련해 민간 자선·압력 단체인 소수민족권익보호협회는 사건이 발생한 뒤부터 경찰 수사와 재판 진행 과정을 모니터하고 있다고 유가족측에 알려 왔다.

당초 관할 경찰 당국은 이번 사건을 가해자가 살인의 고의를 품고 행한 살인 행위, 즉 모살로 파악했다. 지역 신문이나 BBC·ITV의 지역 뉴스는 ‘이번 사건 이면에 단순한 우발적 폭력에 의한 상해치사 차원을 넘어, 인종적 증오와 편견을 포함한 복합적 동기가 숨어 있을 가능성도 경찰 당국은 배제하지 않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목사·유학생·실업인 ‘단합’에 앞장

범인들은 살인죄 외에도 ‘폭행’‘위협적 행동’ 등 20여 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어, 보석 신청이 불허된 상태에서 검찰의 증거 수집 절차인 예비 재판을 이미 네 차례 받았다. 범인들은 사건 현장에서 가까운 동네에 거주하는 파트 타임 육체 노동자들인데, 전과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사건은 영국내 한인 사회가 단합해 공동으로 대처하면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차대한 문제점을 던져 주었다. 그것은 먼저 한인들이 영국에 정착한 지 40년이 지났지만 아직 응집력과 단결력이 부족해 그 어느 소수 유색 인종 사회보다 구성원들의 권익 보호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점을 일깨웠다. 또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익에 기여하거나 봉사하는 데 소극적이었다는 자체 반성도 나오고 있다.

이승준씨가 운명한 지 나흘 만인 8월24일 부인 양씨가 머무르고 있는 셋집 빈소에서 한인회 간부와 목회자, 교수, 유학생회 간부, 실업인 들이 각계 대표로 나서 ‘이승준씨 사건 수습 대책 위원회’를 발족했다. 이 위원회는 장례 집행과 사건의 진상 규명 이외에, 유가족을 위한 성금 모금, 그리고 재영 한인의 권익 옹호를 위한 장기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한인 사회 곳곳에서 유가족을 위로하는 편지와 조의금이 답지하고 있는가 하면, 영국인들도 지역구 출신 여·야 의원, 시장과 경찰서장이 위로 메시지를 보내오고, 이씨가 다니던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진이 위로 편지와 조의 성금 3천 파운드를 보내오는 등 한인 사회와 유가족에게 큰 관심과 위로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고인은, 범인들이 살인 혐의를 벗어나려고 변호사를 통해 시신 정밀 부검을 재요청했기 때문에 아직도 시체실에 안치되어 있어 편히 쉬지 못하고 있다.

95년 영국에 유학을 시작한 남편 이승준씨를 뒤따라 이듬해 영국으로 건너온 양난주씨는, 지난 2년 동안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며 올 1월부터 시작한 이씨의 박사 과정 학업을 내조해 왔다. 젊은 미망인 양난주씨의 결의는 굳다. 그는 “남편의 죽음이 먼저 영국 한인 사회의 권익을 보호하는 자구 조직 탄생에 주춧돌이 되고, 나아가서 인종 차별이 흑인 사회는 물론 아시아인 사회에서 점차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영국에서 소수 유색 인종들의 인권과 권익을 함께 지켜가는 징검다리가 된다면 고인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앞으로 1년 남짓 끌게 될 재판과 경찰들의 내부 조사 절차에 결연히 대응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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