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극물 괴담’…일본 열도 ‘오들오들’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8.09.2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판 음료수 등에 독성 물질 투입 사건 잇달아…모방 범죄 확산, 집단 히스테리 조짐
신흥 사이비 종교 ‘오옴 진리교’ 교도들이 출근길 지하철 전차 안에 독성이 강한 사린 가스를 살포해 무고한 시민 11명이 사망하고 약 5천 명이 다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년 반 전 일이다. 세계 범죄사에 기록될 사린 가스 대량 무차별 살포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 전에 이번에는 독극물에 의한 무차별 살인 사건이 잇달아 벌어져 일본 열도가 들끓고 있다.

도쿄 이케부로 지하철역 근처 F 편의점은 하루 고객이 2천 명이 넘는다. 이곳을 지나치는 직장인·학생 들이 도시락·빵·음료수 같은 가벼운 음식을 사가기 때문이다.

9월 초 이 편의점은 독극물에 의한 무차별 살인 사건이 일본 전국으로 번지자 감시 카메라를 1대에서 3대로 늘리고 아르바이트 점원도 2명에서 3명으로 보강했다. 음료수 코너 진열도 새롭게 했다. 통상 대형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은 음료수를 뚜껑이 앞쪽(고객쪽)을 향하도록 진열한다. 그러나 이 가게는 8월 말 나가노 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청산 화합물이 주입된 우롱차(중국차의 일종)를 마신 중년 남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음료수의 밑부분이 앞쪽을 향하도록 진열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8월 말 나가노 현에서 사망한 중년 남성은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캔 우롱차를 마시고 사망했다. 경찰이 그가 마신 우롱차 캔을 조사해 보니 그 밑에는 지름이 수 mm인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공업용 접착제로 교묘히 봉합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슈퍼마켓 고객들을 무차별 살상하기 위해 청산 화합물을 주입한 우롱차 캔을 점원 몰래 진열대에 슬쩍 놓아 둔 것이다.

음료수 판매 급감…‘거꾸로 진열’ 진풍경

슈퍼마켓에서 산 음료수를 마신 사람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일본 전국의 슈퍼마켓과 거리의 음료수 자동 판매기 판매액은 급격히 떨어졌다. 앞서의 편의점 F도 사건 발생 후 음료수 판매액이 이전보다 절반 가량 떨어졌다고 한다.

음료수 판매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점장 오카다 씨가 궁리해 낸 것이 바로 음료수를 거꾸로 진열하는 방법이다. 오카다 씨는 뚜껑보다는 밑부분을 보고 고객이 직접 구멍이 뚫려 있는가를 확인하라는 의미에서 이같은 방법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일본의 범죄 전문가들에 따르면, 어떤 엽기적인 사건이 화제를 모으면 이를 흉내내는 모방 범죄가 순식간에 번져 간다. 지금 일본 열도를 뒤흔들고 있는 연쇄적인 무차별 독극물 살인 사건도 그 진원지가 따로 있다.

여름이 되면 일본 전국에서는 마을마다 ‘봉 오도리’라 불리는 여름 축제가 열린다. 마을 자치회가 여는 이 축제는 마을 주민들끼리 얼굴을 익히고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다.

지난 7월 하순 일본 중부 도시 와카야마 현의 와카야마 시에서도 여름을 맞아 마을마다 축제가 열렸다. 69세대 2백20명이 사는 소노베 제14 자치회도 예년과 같이 7월25일로 날짜를 잡아 여름 축제를 벌이기로 하고,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줄 카레라이스와 오뎅 따위를 준비했다.

소노베 자치회는 초저녁이 되자 서둘러 마을 주민들에게 카레라이스 배식을 시작했다. 맨 먼저 카레라이스를 먹은 사람은 이 마을 자치회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일찌감치 마을 축제 현장에 들른 초·중·고교 학생과 주부 들이었다.

이들이 카레라이스를 먹고 복통을 호소하자 자치회는 배식을 중단하고 구급차로 병원에 후송했다. 그 중 자치회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초등학생과 여자 고등학생 4명이 이튿날 병원에서 사망했다.

처음에는 이들이 집단 식중독을 일으켰다고 알려졌으나, 그후 경찰이 카레라이스 배식 통을 조사해 보니 농약이나 의약품 원료로 쓰이는 비소가 대량으로 살포되어 있었다.

마을 자치회에 따르면, 여름이면 식중독을 일으키는 O-157 병원균이 활개를 치고, 개나 고양이가 카레라이스 통을 넘나들 염려가 있어 배식하기 직전까지 마을 주부 2명씩을 배치해 교대로 카레라이스 통을 감시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틈을 노려 카레라이스 통에 독극물인 비소를 뿌림으로써 마을 주민 4명이 죽고 67명이 비소에 중독된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일본의 수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런 무차별 독극물 살인 사건은 일반 형사 사건과 달리 수사에 시간이 걸린다. 우선 사용된 독극물의 성분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데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며, 비소라는 감정 결과가 나와도 아비산이냐 비소 화합물이냐를 감정해야 하고, 또다시 이것이 용의자가 은닉한 독극물과 일치하는가를 검증해야 하므로 시일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독극물 사건은 △불특정 다수를 노린 것 △특정인을 노린 것 △특정인을 노렸으나 타인에게 피해가 미친 것 등으로 분류할 수가 있다. 불특정 다수를 노린 사건은, 동기를 알아낼 수 없고, 일반인들이 빈번히 출입하는 곳에 독극물을 방치하기 때문에 수사가 매우 곤란한 것이 특징이다. 특정인을 노린 사건도 용의자로부터 자백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범인이 절대로 증거가 남지 않는 방법을 연구해 범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80년대 중반 일본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이른바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의 범인이 아직도 오리무중인 것이 좋은 예이다. 이 사건은 글리코 모리나가와 같은 유명 제과 회사의 과자에 청산가리를 주입해 거액을 뜯어내려 했던 사건이다. 경찰은 수사진을 수천 명 동원해 공소 시효가 만료되기 전까지 끈질기게 수사했으나 끝내 범인을 체포하지 못했다.
수사 장기화 예사…과열 보도가 ‘모방’ 부채질

일본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독극물 사건은 이처럼 수사가 장기화하기 쉽고, 매스컴이 집중 보도해 이를 모방한 유사 범죄가 반드시 뒤따르기 마련이다. 와카야마 시 마을 축제에서 발생한 카레라이스 비소 중독 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찰은 독극물의 성분을 파악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범인의 윤곽조차 파악하지 못했는데, 텔레비전의 와이드 쇼 프로그램들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사건을 집중 보도하면서 범인 찾기 경쟁을 벌였다. 그 영향으로 카레라이스 비소 중독 사건이 일어난 지 정확히 보름 후 니가타 시의 한 회사에서 종업원 10명이 차를 마시다 구토증을 일으켜 입원한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 수사 결과 종업원들이 마신 차에 나트륨이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그 20일 뒤에는 앞서 말한 우롱차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 각지에서 유사한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음료수 판매액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 가운데 압권은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독극물 사건을 모방해 동급생들과 교사에게 소독약 크레졸을 살 빼는 약이라고 속여 우편으로 우송한 사건이다. 다행히 동급생 1명만 중독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이 사건은 끝났지만, 범인이 미성년자인 여중학생, 그것도 고급 관료의 가정에서 자란 수재형 여중생으로 밝혀지자 일본 사회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국제의료복지 대학 오다 스스무(小田晉) 교수에 따르면, 일련의 독극물 사건 때문에 지금 일본 열도에서는 멀쩡한 음식에서도 냄새나 악취를 느낀다는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 현상’이 번져 가고 있다고 한다. 이는 매스컴의 과열 보도에서 말미암은 현상이며, 과열 보도는 모방 사건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그는 진단한다.

그래서 그는 일련의 사건을 범인이 늘 관객을 의식한다는 뜻에서 ‘극장식 범죄’라고 규정하고, 독극물 소동이 진원지인 카레라이스 비소 중독 사건의 범인이 검거될 때까지 계속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심각한 불황의 여파로 실업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것도 모방 사건을 부추기는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 무차별 독극물 살인 사건으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일본의 안전 신화가 여지없이 무너져 가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