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죽이기’ 저자는 거짓말쟁이 언론인
  • 워싱턴·김재일 특파원 ()
  • 승인 1996.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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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원색> 저자 조 클라인 “안썼다” 오리발로 물의
 
지난 2월 미국 CBS 방송 저녁 뉴스 시간에 기자가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의 칼럼니스트이자 CBS 방송 해설자인 조 클라인에게 “당신이 <삼원색(Primary Colors)>의 저자라는 의혹이 있는데,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클라인은 “나는 아니다. 맹세코 나는 쓰지 않았다. 저자로 나를 짚은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카메라 앞에서 잘라 말했다. 그는 다른 언론이 의혹을 제기했을 때도 그때마다 단호하게 그 가능성을 부인해 왔다. 그러던 그가 지난 7월17일 결국 <삼원색>을 자기가 썼다고 실토했다. <워싱턴 포스트>가 과학적인 증거를 들이대며 집요하게 추적하자, 그는 옴짝달싹 못하고 자신의 저작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저널리스트로서 그의 도덕성에 대한 비난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다.

원제 ‘Primary Colors’는 원색이라는 뜻 외에 예선전(primary)에서 일어난 다채로운 일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익명으로 출간된 이 실화 소설은 클린턴 대통령 부부와 그들의 선거 참모들을 모델로 삼고 있는데, 측근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소설 속에서 클린턴은 잭 스탠턴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는 대권을 노리는 남부의 한 작은 주 주지사로서 ‘사랑 받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호색한’이다. 그는 섹스 추문에다 월남전 징집 기피 사실이 겹쳐 선거전에서 고전하지만 결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따낸다. 힐러리를 모델로 한 스탠턴의 부인 수전은 두뇌가 명석하고 권력욕이 유난히 강하다. 그는 남편의 외도에 복수하려는 듯 시카고의 한 호텔 방에서 스탠턴의 선거 참모인 헨리 버튼과 정사를 벌이기도 한다. 버튼은 92년 클린턴의 수석 선거 참모였던 조지 스테파노폴러스가 그 모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약 1년 전 출간과 동시에 숱한 화제를 뿌리며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초판 6만2천부는 서점에 선보이기가 무섭게 동났다. 지난 1월 말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 출입 기자들에게 이 소설의 작가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클린턴의 요청이 있은 후 저자 찾기 작업은 정치권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언론은 저자 색출 수배령을 내려 놓은 상태였다.

 
이 책을 출판한 랜덤하우스는 지금까지 미국에서만 1백17만부를 출간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워너 출판사는 2개월 안에 이 소설 염가판을 1백50만부 찍어낼 계획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인 마이크 니콜스는 6천5백만달러를 들여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다. 톰 행크스, 엠마 톰슨, 잭 니콜슨, 존 말코비치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할 이 영화는 내년 1월 촬영에 들어간다.

그러면 클라인은 어떻게 덜미를 잡혔는가. 처음부터 클라인을 의심한 언론은 별로 없었다. CNN의 권위 있는 인터뷰 프로인 〈래리 킹 라이브〉에서는 클라인의 이름이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워싱턴 포스트〉 역시 처음에는 만화가인 게리 트뤼도, 선거 상담역인 맨디 그룬왈드, 백악관 보좌관인 조지 스테파노폴러스, 소설가인 크리스토퍼 버클리에게 강한 혐의를 두었다. 클라인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처음 지목한 매체는 <뉴욕>이라는 잡지였다. 이 잡지는 바사 대학의 도널드 포스터 교수를 고용해 익명의 작가를 찾는 작업에 착수했다.

육필로 수정했다가 필적 감정으로 꼬리 잡혀

포스터는 지난 2월 용의자 선상에 오른 여러 명의 글을 컴퓨터로 분석한 결과 클라인을 〈삼원색〉의 저자로 집어 냈다. 포스터는 무엇보다도 이 책의 저자가 클라인처럼 y로 끝나는 형용사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클라인은 〈뉴욕〉이 잘못된 컴퓨터와 엉터리 전문가를 고용했다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후 〈삼원색〉 작가 찾기는 별 진전이 없었다. 랜덤하우스 출판사측에서도 대표 한 사람 외에는 작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엉뚱한 데서 꼬리가 잡혔다. 지난해 4월 클라인의 대리인이 출판사측에 전달한 원고에는 작가가 컴퓨터 인쇄 열 군데 정도를 지우고 손으로 직접 고쳐 쓴 대목이 있었다. 그 원고는 책이 출판된 후 출판사의 누군가에 의해 중고 책방에 팔렸다. 책방 주인은 당시 베스트 셀러 원고라는 점을 생각해 2백달러를 책정해 놓고 있었다.

모든 언론이 익명의 작가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워싱턴 포스트>의 데이비드 스트레잇펠드 기자가 출판사측에 전화를 걸어 원고에 손으로 고친 흔적이 없었는지 묻기 전까지는 누구도 거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다. 중고 책방에서 원고를 입수한 <워싱턴 포스트>는 수년간 시카고 경찰 범죄 수사국에서 필적 감정가로 일한 머린 캐시 오웬스를 고용해 원고를 수정한 필적과 클라인이 손으로 쓴 글의 견본을 대조하게 했다. 오웬스가 ‘필체가 완벽하게 일치한다’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익명의 작가 찾기 게임은 끝났다. 클라인은 꼼짝없이 자신이 거짓말을 해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정계와 언론계 인사들은 1년 남짓 계속된 클라인의 속임수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클라인의 거짓말하는 버릇은 깜짝 놀랄 만하다’ ‘그는 인격 테스트에서 실격 판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돈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그는 자신만 다치게 한 것이 아니라 언론산업에 해를 끼쳤다. 이는 언론을 대적하는 세력에게 무기를 선사한 것으로, 그들은 우리 언론인에 대해 초라하고 치사한 놈들이라는 인상을 가질 것이다’. 이상이 클라인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들이다.

클라인은 자신이 익명으로 남고자 했던 것은 책 판매를 늘리려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변명했다. “나는 평론가들이 문학적인 가치보다도 저널리스트로서의 나의 명성을 바탕으로 해 이 소설을 평가할까 봐 두려웠다.” 또 그는 “나는 칼럼에서 거짓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인으로서 나에 대한 신뢰성은 의심 받을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클린턴의 언론 담당 비서였던 디디 마이어스는 빈정대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신뢰성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조, 당신은 어느 혹성에서 방송을 하고 있는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당신은 길고도 험한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할 것이다.”

정치 전문 저널리스트로서 조 클라인은 자신처럼 거짓을 행하는 정치인에 대해 어떤 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겉과 속이 다른 언론인에 대해 가지는 일반의 의구심이다. <뉴욕>의 칼럼니스트였던 그는 92년 1월 주요 언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클린턴 후보를 칭송하는 커버 스토리를 썼다. 그후 그는 곧 <뉴스위크>로 옮겨 정력적인 취재 활동을 벌여왔다. 그러다가 93년 말께부터 그는 ‘대통령이 인간적으로 신뢰성이 없다’라면서 클린턴을 공격하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6백만달러 벌고 언론인 명예 잃어

도덕성 문제와 관련해 <뉴스위크>의 메이나드 파커 편집장 역시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는 클라인이 <삼원색>의 저자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파커는 부하 기자들로 하여금 익명의 저자가 누구인가에 관해 추측 기사들을 쓰도록 했을 뿐 아니라, 클라인이 자기가 저자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말을 실어 주었던 것이다. 파커는 “나는 클라인이 그 소설을 쓰고 있다고 내게 털어놓은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의 거짓말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책이고, 저자임을 밝히고 안 밝히고는 그가 결정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최근 <뉴스위크>의 리처드 스미스 사장은 조 클라인이 수주 동안 기사를 쓰지 않으면서, 수개월간 거짓말을 함으로써 손상된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자신이 저자임을 인정한 후에도 다소 뻣뻣한 태도로 변명하기에 바빴던 클라인은 눈물을 흘리며 <뉴스위크> 직원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스미스 사장은 파커 편집장에 대해서는 신임 의사를 표시했다. CBS 방송은 아직 클라인에 대해 어떤 조처를 취할 것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클라인은 베스트 셀러 소설 하나를 써서 6백만달러라는 거액을 챙겼다. 그러나 그는 언론인으로서의 명예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보도의 정직성은 바로 기자 개인의 정직성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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